Day 10 | 설산의 진수 마운트 레이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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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도 끝나고 이젠 본격적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19박 20일의 긴 여정이었지만, 학회 기간 제하고, 오가는 길 3일씩 왕복 6일 제하고, 주말을 제하고 나면 실제 수형이 써야 하는 휴가는 고작 4일. 수형의 교수님은 뱅기값 굳어서 좋고, 우리는 휴가 굳어서 좋고, 모두가 행복한 여행이다.
마운트 레이니어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706번 국도를 타고 니스퀄리 입구 (Nisqually Entrance) 로 들어갔다. 점심을 사러 들른 마트에서 만난 어느 백인 할머니께서 늘 구름이 끼는 날씨 때문에 마운트 레이니어의 정상을 보기란 참 힘든 일이라며 우리의 행운을 빌어주셨다.
마운트 레이니어 국립공원 지도 | Mount Rainier National Park Map
수형이 좋아하는 야생 동물 관련 표지판.
마운트 레이니어는 둥글게 솟아오른 산을 중심으로 남쪽과 동쪽을 달리는 도로가 나있는데 남쪽의 파라다이스 (Paradise) 지역과 동북쪽의 선라이즈 (Sunrise) 지역이 유명하다.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은 지역은 아니지만 우리는 혹시나 고산의 야생화 벌판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에 나타난 무지개빛 구름. 나는 미국에 와서야 제대로 된 무지개를 처음으로 보았다. 몇 년 전 우리 동네에 작은 토네이도가 지나간 적 있는데, 무섭게 몰아치던 비바람이 그치자마자 하늘에 엄청나게 크고 완벽한 무지개가 떠올랐다. 자두가 토네이도의 선물이라며 흥분해서 소리쳤지만 아름다운 빛깔로 높게 자리잡은 무지개를 보고 들뜬 건 자두만은 아니었다.
하늘에 떠오른 생선가시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마운트 레이니어의 정상. 이 눈덮힌 설산 고봉은 4,392 미터에 이르는 아주 높은 산이다. 알래스카를 제외한 미국에서 제일 높은 산인 마운트 휘트니가 4,418 미터니까 채 30미터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마운트 레이니어는 다섯번째로 높은 산이라는 점. 30 미터 상간으로 순위 다툼이 상당히 치열한 듯.
할머니의 축복 덕분인지 예감이 좋다. 오늘 마운트 레이니어의 정상을 또렷이 보고 가는 운좋은 나그네가 될 것 같다.
할머니의 축복 덕분인지 예감이 좋다. 오늘 마운트 레이니어의 정상을 또렷이 보고 가는 운좋은 나그네가 될 것 같다.
마운트 레이니어는 아주 예쁘게 솟아오른 전형적인 삼각산의 모습이었다. 가보진 않았지만 일본의 후지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덮힌 산봉우리는 공원 내 도로의 어디서건 쉽게 눈에 띄는 주인공이었다. 마치 흰색 페인트로 칠해놓은 듯한 설산은 아름답긴 하지만 솔직히 계속 보기엔 지루했다. 하얀 장막을 쳐놓은 것 같아서 그대로 획 벗겨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파라다이스 지역에 도착했다. 여기선 구름이 흘러가는 방향에 따라 마운트 레이니어의 정상이 좀 더 또렷이 보였다. 눈덮힌 산등성이를 오르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비지터센터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는데, 근처 테이블에서 한국인 대가족이 제대로 판을 벌리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대여섯가지가 넘는 반찬에 브루스타 놓고 고기까지 굽고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 옆에 앉은 어느 미국인 노부부가 눈이 동그래져서 그 광경을 쳐다보더니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마침 감사하게도 우리가 한국인인줄 아시고 어르신께서 반찬을 가져다 주시길래 옆의 노부부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그제서야 나에게 조용히 묻기를, "너희는 원래 이렇게 (거나하게) 먹니?"
아마도 일 년의 반절 이상은 눈에 가려있을 마운트 레이니어의 절경을 못보고 가는게 아쉬울 따름이다.
아무리봐도 4,300 미터가 넘는 산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한걸음에 성큼 올라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빙하가 녹아내리며 만들어진 것인지, 산사태가 난 지역인지.
양지바른 길가에는 이제서야 야생화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듯. 지금이 6월말인데 도대체 언제나 눈이 녹아 꽃을 피우고 씨를 맺을 건지들. 7월을 코앞에 두고 이렇게 눈만 보고 갈 줄은 정말 몰랐다.
굽이굽이 능선따라 이어지며 경계를 긋기 모호한 산맥들을 주로 봐서 그런지 이렇게 덩그러니 솟아있는 산을 보는게 조금 낯설기도 하다. 그래서 이곳을 마운틴 레이니어가 아니라 마운트 레이니어라고 부르는가보다.
선라이즈 지역으로 가는 길. 겨우내 저렇게 눈에 쌓여 있으면서도 생명을 유지하는 나무들이 대단해보인다.
화이트 리버 입구 (White River Entrance) 를 지나면 거의 유턴하듯 꺾어지는 지그재그 산악도로를 타고 올라간다.
아래 보이는 풍경은 짐작한 대로 추위에 얼어붙은 호수다. 지도를 찾아보니 선라이즈 레이크 (Sunrise Lake).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으로 검증 완료. 얼음이 어떻게 얼은 건지 신기하게도 호수의 표면이 안쪽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모양이다.
같은 전망대에서 바라본 주변 풍경. 산세 험한 산악 지역에서 보기 드물게 평평하고 나무도 자라지 않는 메도우 (Meadow) 인 듯. 여름이면 아름다운 야생화 가득하여 감히 발도 내딛기 어렵겠지만 눈으로 모든 것이 가려진 이곳에는 아웃도어맨들의 자취가 한가득이다.
선라이즈 비지터 센터 쪽으로 올라가는 길. 눈 앞에 보이는 것이 마운트 레이니어 정상. 마치 워싱턴 디씨에선 어딜가나 워싱턴 모뉴먼트 (Washington Monument) 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이곳에서는 공원 내 어디서든 마운트 레이니어를 볼 수 있다. 그만큼 고도가 높고 산세가 가파르다는 뜻이겠지. 솔직히 여행기 쓰기 전까지는 이렇게 높은 산인 줄도 몰랐다. 공원 진입로의 고도가 500 미터 정도인데 정상부가 4,400 미터에 육박할 정도니 얼마나 우뚝 솟은 산인줄 알겠다.
마운트 레이니어는 쉽게 말해 화산이다. 그것도 휴화산. 형성과정이 후지산과 같은 성층화산이라는데 그래서 처음 봤을 때 후지산 생각이 났구나 싶었다. 이렇게 눈으로 덮힌 모습을 보면 완전히 차갑게 식은 산처럼 보이는데 그 안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다이나믹한 곳이라니.
겨우 며칠 전에 오픈한 도로라 그런지 쌓여있는 눈들이 싱싱하다. 파라다이스 지역보다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정상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마침내 도착한 선라이즈 비지터 센터는 온통 눈으로 덮혀있고 주차장에 서있는 차가 딱 한 대 밖에 없었다. 볼거 없이 그대로 차를 돌려 나오고 말았다.
마운트 레이니어에서 내려온지 한 시간도 안됐는데 금새 주위 풍경이 이렇게 달라진다.
노을지는 캐스케이드 산맥을 바라보며 숙소인 웨나치 (Wenatchee) 로 가는 길. 오늘도 깜깜해져서야 숙소에 들어간다. 밤길 운전 되도록 피하자고 계획했지만 유난히 밤길 운전이 많았던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