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9 | 거칠어서 매력적인 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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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학회 일정을 마치고 오레건 코스트 (Oregon Coast) 로 향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에콜라 주립공원 (Ecola State Park). 3,000 마일을 달려와 만난 태평양이여, 너에게 이런 거친 아름다움이 있었음을 4년간 잊고 있었구나.
쉴새없이 밀려드는 파도의 움직임이 낯설어 생각해보니 이렇게 측면에서 바다를 보는게 처음이다. 늘 앞에서 밀려오는 파도만 보았지 옆에서 겹겹이 쌓여가는 파도의 물결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짙푸른 바다색과 넓게 깔린 파도의 물보라가 참 아름다와 보이는 풍경이었다.
저멀리 해이스택 락 (Haystack Rock) 이 보인다. 오레건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인 해이스택 락.
에콜라 주립공원의 트레일.
카시트에, 유모차에, 아기띠에, 그저 여행 내내 갇혀 지내야 하는 호두의 운명. 이러니 호텔을 제일 좋아할 수 밖에.
에콜라 주립공원에서 멀지 않은 캐논 비치 (Cannon Beach) 다운타운.
다운타운에서 S선배네 가족과 저녁을 먹었는데, 식당 안에 있던 어느 미국인 가족이 호두를 봐줄테니 편히 밥 먹으라고 하는거다. 미국 사람들에게도 이런 면이 있구나 싶어 재밌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해서 잠시 호두를 맡겼다. 물론 먹는 내내 눈은 흘끗, 귀는 쫑긋 긴장을 늦추지 않았지만.
완벽한 내륙지방에 살면서 몇 년만에 겨우 한번씩 보게 되는 바다인데도 낯설지가 않다.
캐논 비치 (Cannon Beach) 의 풍경. 미국 서부 해안지역의 바닷가 풍경은 플로리다의 해안과는 완전히 다르다. 플로리다에서는 절벽에 서서 바다를 마주할 일이 없었다. 언제나 같은 눈높이에서, 바다가 끝나는 바로 그 지점에 서서 바다를 만났다. 자신이 가진 무한함과 포용력으로 부드럽게 육지를 감싸 안으며 다가오는 바다에는 자신을 돋보이게 해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 자체로 어필하고, 어떤 도움도 어떤 꾸밈도 없이 존재하기에 쉽게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는 군자, 대인배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태평양은 달랐다. 태평양은 절벽을 향해, 거친 바위를 향해 부딪히며 깨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바다였다. 눈높이를 맞춰 바라보기 보다 언제나 한단계 높은 곳에서 군림하듯 내려다보는 바다였다. 육지와의 경계에는 험하게 생긴 바위들이 진을 치고 있어 쉽게 열고 들어오기 어렵지만, 구경꾼들 눈에는 이처럼 조화롭고 인상깊은 풍경이 또 없다. 일생의 작품을 위해 자기 몸 불사르는 예술가 같은 느낌이랄까, 감히 발을 담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존재이다.
멀리 보이는 바위 섬이 해이스택 락.
자두와 약속했던 연도 날리고.
썰물 즈음이라 그런지 얕은 바다가 멀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해이스택 락을 찾아왔다.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주택가에 적당히 차를 대고 들어가는 길.
방학 동안 자두에게 영화와 애니매이션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어제 아주 오랜만에 영화 구니스 (Goonies) 를 같이 보면서 첫 장면에 나온 해변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좋아해서 몇 번씩 보았던 이 영화의 배경이 바로 오레건 코스트였다니. 화면에 비친 해이스택 락을 보고 반가워 자두와 호들갑을 떨었다. 영화 속의 캐논 비치는 아마도 겨울에 찍은 듯, 음산하고 차가와 보이는 해변이었지만 거친 매력이 느껴지는 무채색 풍경이었다.
아까는 멀리서 봐서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는데 막상 가까이 와서 보니 엄청나게 큰 바위 산이었다. 생각보다 너무 거대해서 정말 깜짝 놀랐다.
바닷물이 들어오면 꽤나 높이까지 잠기는 모양인데 마침 썰물 때라 바위가 밑둥까지 다 드러나 더 거대하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바위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금지. 혹시 모를 안전사고에 대비하고, 새들의 서식처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해이스택 락은 유명한 퍼핀 (Puffins) 서식처. 바위섬 정상을 맴도는 새들이 대부분 퍼핀들이다.
썰물의 바닷가. 저물어가는 태양을 안고 묘하게 아름다운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여기저기 고여있는 물과 바위 틈에는 물러가는 바닷물이 미처 함께 데리고 가지 못한 온갖 종류의 바다 생물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썰물은 해조류의 식사 시간. 바닷물이 물러간 틈을 기회 삼아 광합성으로 포식들 하는 모양이다.
아이들은 바다 생물 관찰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우리는 얇은 재킷만으로 견디기 어려운 추위를 참아가며 캐논 비치의 해질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실로 얼마만에 보는 바닷가 노을인지.
그저 한없이 넋놓고 바라보았던 해 저무는 바닷가 풍경은 아마도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이 있어 더 와닿았던 것 같다.
포틀랜드까지 돌아갈 길을 생각하면 해지기 전에 출발했어야 했는데 오랜만에 보는 바닷가 노을이 너무 귀해서 어둑해질 때까지 다들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뒤늦게 출발해 포틀랜드까지 돌아가는 80마일 드라이브는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긴장과 불안이 연속되는 드라이브는 앞으로 여행 끝날 때까지 수없이 나온다.) 학회 발표 준비로 제대로 밤잠을 못잔 수형이 드디어 잠귀신을 영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밤운전이 익숙치 않은 내가 운전하는 꼴은 못보시겠다는.
오는 길에 감탄하며 보았던 빽빽한 침엽수림는 어느새 외진 국도의 공포 분위기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호러 배경이 되었고, 제 세상 만난 잠귀신 물리치느라 나는 옆에서 온갖 굿판을 벌려야 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