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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여행/2010

제53편. 미대륙횡단 III 제5부: 어눌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한 장의 사진 (Crater Lake National Park, 2010/06)

Day 5 | 세상에서 가장 깊고 푸른 물빛
2010년 6월 25일
Reno, NV - Oregon - Crater Lake National Park - Portland, OR
600 miles / 970 km


몇 푼 아끼려다 고생스런 저녁을 보냈다. 궁상은 이제 그만, 여행지에서 쓰는 2-3불은 때로 반나절의 값어치를 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안고 리노를 떠났다. 오늘 드디어 집 떠난지 5일만에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오레건 포틀랜드에서 밤을 보내게 될 것이다.




리노를 벗어나자마자 캘리포니아에 입성한다. 척박한 반사막의 초지, 키 작은 관목들만 듬성듬성 자라는 벌거벗은 민둥산, 낮은 산과 구릉이 연이어 나타나는 산맥의 연속. 이렇게 보면 캘리포니아의 풍경은 뉴멕시코나 애리조나의 연장에 다름 아니다. 헐리우드 영화를 보며 막연하게 꿈꿔왔던 이상 속의 캘리포니아는 이와는 거리가 먼 화려하고 생명력 넘치는 풍요로운 곳이었는데. 처음으로 차를 몰고 캘리포니아에 입성하던 날,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의외의 모습에 낯설어하며 한참을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오레곤 스테이트 라인을 건넜다가 다시 유턴해서 찍은 캘리포니아 웰컴 표지판. 2006년 대륙횡단 때 캘리포니아 스테이트 라인 십분 전부터 호들갑을 떨며 사진 찍을 준비를 했는데 셔터를 누르는 순간 운전하던 수형이 창문을 닦아준다며 와셔액을 뿌리는 바람에 망쳐버린 후 오늘까지 4년을 벼르고 벼른 끝에 마침내 손에 넣었다. 근데 솔직히 이건 너무 촌스럽잖수.




드디어 오레건이다. 미리 알아보고 가지 않았다면 상당히 당황했을 오레건주 여행의 팁은, 바로 셀프 주유 금지다. 한국과는 달리 오레건과 뉴저지 주를 제외한 모든 미국의 다른 주에서는 운전자들이 직접 개스를 넣는다. 그러다보니 타인이 내 차에 개스를 넣어준다는 게 낯설고 왠지 모를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8년 전 어느날, 차를 사고 처음으로 개스 넣는다고 주유기 앞에서 서서 어찌할 지 몰라 우왕좌왕했던 생각에, 참 미국 온 지 오래됐구나 싶어 수형과 둘이 허탈하게 웃었다. 첨에 미국와서는 개스 넣는다고 하면 어떻게 '개스' 를 넣는가 말도 참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젠 기름넣는다면 차에 식용유 붓는 생각이 떠오르니, 이러다 한국가면 같지도 않은 영어 쓴다고 한참 욕들어 먹을게 뻔하다.




문제는 팁이다. 주유할 때마다 매번 팁을 줘야 한다면 1-2불 아끼려고 싼 주유소를 찾아다니는 우리에겐 유쾌하지 않은 출혈이다. 남편과 팁을 줄까 말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개스를 넣던 아저씨가 능숙한 솜씨로 차창을 닦기 시작했다. 그것도 무척 꼼꼼하게. 평소 같으면 굳이 안닦아도 되는 창을 왜 닦으셔서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나 싶었을테지만, 이번 여행에선 차창 닦는 일이 우리에게도 꽤 중요한 일과였기 때문에 누군가 성의있게 창을 닦아 주는 것이 되게 좋았다. 기분좋게 팁 드리고 출발. 나중에 찾아보니 보통 오레건 주민들은 주유시 팁을 안준다고 한다. 대신 타주 사람들이 개스를 넣을 때는 팁을 달라는 암묵적인 요구/압박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그 케이스였던 것 같다. 차 번호판에 우리 인디애나에서 왔다고 떡하니 써있음.




오레건 시골길을 달려간다. 하늘엔 고요히 흐르는 구름, 앞에는 눈 덮힌 산, 양 옆에는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 떼들, 차 안에는 세상 모르고 잠들어있는 사랑스런 내 아이들.




오늘의 목적지인 크레이터 레이크 국립공원 (Crater Lake National Park). 드디어 설산이 제대로 어울리는 지역에 도착했다.




오레건의 자랑인 울창한 삼림. 시원하게 쭉쭉 뻗은 나무들은 얼핏 봐도 그 높이가 이십미터는 족히 넘어 보인다.




원색의 자동차 형제들. 국립공원에는 저렇게 눈에 띄는 독특한 모양의 차들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산악도로를 타고 슬슬 올라가기 시작한다. 2,000 미터가 넘는 높이라 그런지 아직 채 녹지 않은 눈이 길가에 가득 쌓여 있었다. 6월 말에 눈이라니. 체감 40도를 육박하는 뜨거운 한증막에서부터 눈 덮힌 산까지, 사계절 골고루 맛보고 있는 여행이 아닐 수 없다. 아스팔트 도로 옆에 몇 미터 간격으로 긴 장대가 꽂혀 있다. 눈이 많이 내렸을 때 제설차가 도로에서 벗어나지 않게 인도해주는 표지인 것 같다. 장대의 길이를 보니 눈이 어지간히 많이 내리는 지역이구나 싶다.



더이상 말이 필요없는 크레이터 레이크의 장관. 숨막히게 푸른 물빛이 영락없이 콜로라도와 유타에서 보았던 하늘빛이다.




여행 준비하면서 사진으로 여러 번 보았던 풍경이지만 막상 직접 와서 보니 그 감동이 열 배는 넘는 것 같다. 카메라로 사각틀에 담아낸 사진의 매력은 바로 사진으로는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그 한계에 있는게 아닐까. 같은 풍경이지만 공간 이동을 하면서 잃어버리는 그 무엇, 아무리 잘 찍은 작품이라도 표현해낼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안타까운 한계가 놀랍게도 오늘의 감동을 배가시켰다는 사실. 이래서 내가 노자와 장자의 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의 날씨는 크레이터 레이크의 물빛을 최고로 아름답게 보여주는 깨끗한 유리창 같다. 호수의 물빛은 날씨에 많이 좌우된다. 날씨가 흐린 날은 아무리 아름다운 호수라고 하더라도 그 물빛이 바래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최고의 순간을 맛보게 해준 모든 것에 감사한다.




호수 안에 떠있는 작은 섬은 위저드 섬 (Wizard Island). 호수 건너편에 위저드 섬으로 가는 배가 있다는데 호숫가로 내려가는데까지만도 두시간이 넘게 걸리는데다 올해에는 아직 개장을 안했다고 한다.




겨우내 내린 눈이 녹아내려 그 풍부한 물로 호수가 가득 찼다. 물이 너무 맑아 아주 깊은 곳까지도 이끼 같은 식물들이 살 수 있다고 한다. 놀랍게도 수심 592미터의 크레이터 레이크는 미국에서 가장 깊은 물이라고 한다. 가장 깊은 물에서 우러나오는 물빛이라 더욱 더 깊은 색을 내는 것이 아닐까.




여행기를 쓰는 시간은 나에게 있어 과거로 회귀하는 유일한 통로이자 잊어버린 감수성을 회복하는 즐거운 치유의 시간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자아를 밖으로 표출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몸으로, 어떤 사람은 그림으로, 외모로, 글로, 노래로, 춤으로, 말로, 지식으로. 방식은 다양하지만 결국 이는 표현의 주체인 '나' 라는 존재를 좀 봐달라는 메세지에 불과하지 않을까. 물론 자아를 백퍼센트 배제한 순수 타인 중심의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정말 어려운 일이라 자아가 개입되지 않은 사회변혁과 인류구원의 뜻을 표출해내는 사람을 우리는 성인군자, 아니면 바보라고 부른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를 실어보낼 수 있는 유일한 표현방법은 글이다. 내가 글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유일하게 나에게 '가능'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다고는 하나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타향살이 몇년 하다보니 내 나라 말도 자꾸 잊어버리게 된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하루살이 현실은 내 삶을 감성이나 지성이 아닌 살아가는데 필요한 구체적인 정보들로 메워버렸다. 부족한 어휘력을 보충해보려고 문인들이 쓴 여행기를 들쳐보다 덜컥 겁이 나서 금새 그만 두었다. 단어 몇개 배우려다 본의 아니게 남의 글 도둑질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난 내가 어휘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좋은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여행기들을 몇 편 읽고 나니 마음에 와닿는 여행기는 어려운 한자어를 쓰지 않아도 글을 쓰는 사람이 여행지를 다니면서 느낀 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낸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결국 의지해야하는 것은 나 자신.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나' 인데 나를 들여다보지 않고 어떻게 나를 표현 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이 여행기는 우리 가족이 함께 한 여행을 내가 대표해서 글로 쓰는 것이다. 내가 집중해야할 대상이 늘어난다. 그래서 쉽지가 않다. 제대로 해보려니 어렵다.




즐거운 부담이다. 우리의 여행을 글로 되돌아 본다는 것은. 그래서 사진은 우리의 여행기에서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가끔씩 나의 어줍잖은 미사여구가 필요하지 않은, 사진이 말을 하는 여행지를 쓸 차례가 오면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오레건의 크레이터 레이크 국립공원이 바로 그런 곳이다.




여행 다니면서 느낀 점 하나. (일반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들은 어디가면 보통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고*, 미국 사람들은 여행에 필요한 장비/물품에 더 신경쓰는 것 같다. 국립공원에서 하이킹을 하다보면 우리같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미국인 가족들을 흔히 만나는데 꼭 지게같이 생긴 아이 전용 배낭에 애들을 메고 다니는 걸 많이 봤다. 몇번이나 쓰겠나 싶어 나는 절대 안 살거 같은데 말이다. 그리고 꼭 전문 산악인이 아니더라도 보통들 옷이나 장비를 제대로 갖춰입고 하이킹을 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반면에 점심은 달랑 샌드위치와 음료수가 끝.

2013 Updated | 한국에 귀국해서 보니 내가 쓴 한국 이야기는 다 10년 전 구닥다리 이야기였다. 10년 사이에 한국은 너무 많이 변해서 따라가기 급급하다.




햇살 한가득, 미소 한가득. 유난히 잘 웃는 우리 호두.




도로를 타고 서쪽을 끼고 돌아 위저드 섬이 좀 더 가까이 보이는 전망대에 올랐다.




짙은 물빛만큼이나 푸른 깃털을 가진 스텔러스 제이 (Steller's Jay). 한동안 새에 심취해 있었던 자두가 도감을 가져와 일분만에 이름을 찾아주었다.




이런 그림 같은 풍경은, 실제로 보면 정말 이차원의 배경화면 같이 보여 손을 내밀면 벽처럼 만져질 것 같다. 그랜드 캐년 이후로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아직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뜨지 못한 일곱 살짜리 자두도 최고로 멋있다는 말을 여러번 외쳤다. 특히 화산폭발로 인한 이 지역의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비디오는 넋을 잃고 몇 번씩 볼 정도였다. 이 자리에서 실시간으로 자두를 인터뷰 해본다.

은영: 자두야, 크레이터 레이크 기억나?
자두: 어.
은영: 거기 어땠어?
자두: 너무 좋았어.
은영: 뭐가 좋았는데?
자두: 거긴 퍼펙트 써클이었어.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위저드 아일랜드야.
은영: 거기가 왜 좋아?
자두: 거긴 아주 작고 귀여워. 내가 거기에 살았으면 좋겠어. 근데 싫은 것도 있어.
은영: 그게 뭔데?
자두: (눈 녹은) 물이랑 흙을 밟고 가는 건 내 발에 묻어서 너무 싫었어.
은영: 거기서 비디오 봤던 거 기억나? 그건 어땠어?
자두: 그건 라바 (용암) 때문에 좀 무서웠어.
은영: 다시 가자면 또 갈꺼야?
자두: 응. 근데 이제 그만 물어볼래? 나 책 읽고 있잖아.




공원을 빠져나가는 길.




직선으로 곧게 뻗은 15마일의 도로.




이제 반절의 일정을 마치고 최종 목적지 포틀랜드로 향한다. 쉼없이 달려온 5일간의 자동차 여행은 잠시 그 휴식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