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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여행/2010

제50편. 미대륙횡단 III 제2부: 시간 잡아 먹는 여행 블랙홀 (Great Plains, 2010/06)

Day 1 | 한밤중의 스톰 경보
2010년 6월 21일
West Lafayette, IN - Coralville, IA
400 miles / 650 km


언제나 그렇지만 제일 부족한 것은 시간. 휴가는 화요일부터지만 월요일 저녁, 수형이 퇴근하자마자 출발하기로 했다. 하루종일 짐싸고, 집 치우고, 음식하고, 애들하고 씨름하다보니 어느덧 저녁 6시. 집에서 아이오와 접경까지는 여섯 시간 거리, 첫날부터 너무 무리하는거 아냐.
프라이스 라인 (Priceline.com) 이라는 호텔 예약 사이트는 경매 방식으로 원하는 호텔 가격을 입찰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이트 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예약을 할 수 있다. 다만 일단 방을 낙찰 받으면 취소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떻해서든 끝까지 달려야 한다. 비딩의 세계에서 후회는 금물. 목적지는 도착하라고 있는 것. 밟아라 밟아.




일리노이 웰컴센터 (Welcome Center: 주 경계선의 여행정보센터) 에 도착해 오징어 덮밥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 좋았다. 어느덧 해가 지고, 깜깜해진 길을 달리며, 급하게 나오느라 두고 온 건 없나, 문단속은 잘하고 왔나 짚어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번쩍번쩍 경찰차가 따라왔다. 첫날부터 운도 없게 경찰이라니. 그런데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번쩍, 왼쪽에서 번쩍번쩍. 아니 경찰이 아니고 설마 번개?




갑자기 사방에서 번개가 치기 시작하는데 그 화려함이 나이트 클럽 조명 저리가라다. 잡지에나 나올 법한 그림같은 번개들이 사방에서 3초에 한번씩 내리치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장에서의 밤이 이렇게 공포스러울까. 몇 마일 밖에서 내리 꽂는 번개들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피할 곳 없는 허허벌판인듯, 이대로 차를 돌려야 하는지 판단도 내리지 못한 채 수형은 열심히 엑셀을 밟아댔다. 유난히 날씨에 관심이 많은 자두는 겁에 질려 한시도 창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나 역시 조바심을 내며 창밖을 주시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번쩍대는 번개들, 조금씩 익숙해지고 나니 무섭고 긴장되는 가운데에서도 눈앞의 광경이 대단하고 멋지게 보여 급기야 달리는 차안에서 번개를 찍어보겠다고 카메라를 들었다. 물론 찍을 수 없었다. 대신 동영상을 찍어 캡쳐한 것이 위의 사진이다.






Day 2 | 시간 잡아 먹는 블랙홀
2010년 6월 22일
Coralville, IA - Denver, CO
800 miles / 1300 km


깜깜한 밤에 하늘에서 번쩍거리는 번개를 보는 것은, 호텔 방에서 불끄고 누웠는데 수형이 티비 채널을 돌리는 바람에 감은 눈에서도 깜박거리는 빛이 느껴질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번개가 치는 순간이면 꼭 카메라 플래쉬를 터트린 것처럼 환해지면서 주변 풍광이 보였다. 번개쇼는 아이오와 접경에 도착할 즈음에야 겨우 그치고 우리는 그제서야 한숨 돌리고 호텔을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가도가도 끝없는 옥수수밭 때문에 지루하기 이를 때 없다는 일리노이주를 하나도 지루하지 않게 통과한 셈이다. 다음 날 뉴스를 보니 우리가 달려 온 그 지역에 적게는 몇 천 건에서 만 건 이상의 번개가 쳤다는 소식이다. 첫날부터 공포영화 완전 제대로 찍었다. 번개 때문에 팍 쫄아버린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날씨 확인부터 들어갔다. 역시나 아침부터 폭풍주의보 발효. 오늘은 대평원을 지나야 하는데 어디 숨을 곳도 없는 평지에서 토네이도라도 만나면 어쩌나 내심 겁이 났다. 우리가 묵었던 코랄빌 (Coralville) 에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아침 9시가 다 되어서야 출발했다.
주위엔 온통 밭이다. 일리노이, 아이오와주를 관통해 달리며 주위에 끝없이 펼쳐진 밭을 본다면 누구라도 왜 미국이 농업국가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짙게 깔린 구름 아래 뿌옇게 흩날리는 검은 먼지같은 것들이 바로 소나기다. 2006년 첫번째 대륙횡단을 하면서 텍사스를 지날 때 처음으로 소나기가 내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모래 폭풍이다, 화재 현장이다 수형과 내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미국이란 나라는 저멀리 비 내리는 광경까지 볼 수 있을만큼 넓은 나라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신기해하던 기억이 난다. 날이 흐리니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어 낭패다 싶었는데, 차라리 흐리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씨가 여름철 자동차 여행에는 최고라는 사실은 이날 오후에 절실히 깨달았으니.




아이오와주 웰컴센터를 찾아 얼결에 들어간 국도 끝에는 예쁜 풍차를 상징으로 하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동안 미국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유럽식 관광도시로 개발된 작은 타운들을 여럿 보았다. 캘리포니아의 산타바바라 같이 도시가 형성될 무렵에 유럽에 의해 지배된 적이 있어 자연스럽게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곳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마을 전체를 유럽식, 특히 북유럽식으로 개조한 작은 타운들도 많이 보았다. 대부분 자연이 주는 관광자원이 없는 지역에서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개발한 도시들이었다. 그러고보면 미국사람들에게 유럽은 일종의 동경의 대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파랗게 개인 여름 하늘과 흰구름, 초록빛 옥수수잎과 빨간 트랙터가 참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내가 사는 인디애나도 온통 옥수수밭과 콩밭 뿐이다. 그런데 이 대부분의 옥수수가 식용으로 재배되는 것이 아니고, 가축의 사료나 그밖의 다른 용도로 쓰이기 때문에 가을이 되어 옥수수가 다 익어도 따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옥수수대까지 한꺼번에 추수한다고 한다. 일리노이, 아이오와를 비롯한 미국 중부지방을 다니다보면 옥수수밭, 그리고 초원에서 풀을 뜯는 소떼들을 질리도록 볼 수 있는데, 이런 풍경을 볼 때마다 자꾸 오늘날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70퍼센트 이상이 가축의 먹이로 제공된다는 사실, 이 정도의 곡물이라면 4억이 넘는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사실들이 떠올라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든다.




여기는 네브라스카 (Nebraska), 미국 대평원의 중심이자 캔사스와 더불의 미대륙의 한가운데 위치한 주다. 네브라스카에는 다른 주들처럼 주경계선 근처에 따로 웰컴센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휴게소 (Rest Area) 가 나오는데 각 휴게소마다 네브라스카주의 여행정보를 구비해놓고 있었다.




미국의 대평원을 가로질러 달리는 중.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태극전사들의 월드컵 16강 진출 소식을 들었다.




미국의 중요한 목우지대인 대평원 (Great Plains) 은 미대륙의 중앙이자 록키산맥의 동쪽에 위치한 말 그대로 넓은 평원이다.




북으로 캐나다에서 시작해서 미국의 몬타나 주,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와이오밍, 콜로라도, 네브라스카, 오클라호마, 캔사스, 그리고 텍사스와 뉴멕시코에 이르는 너비 약 500 마일의 이 거대한 평원은 사실 관광의 불모지라 대륙횡단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는 시간만 잡아먹는 골치거리 지역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여행에서도 대평원과 그 인접지역인 일리노이, 아이오와, 미네소타 같은 주를 통과하는데 중간에 밥먹고 쉬고, 주유하는 것 외에는 따로 들르는 곳 없이 그저 달리기만 했는데도 왕복 꼬박 이틀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 여행의 시간 잡아먹는 블랙홀이라고만 생각했던 이 대평원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바꿔놓는 일이 있었다. 얼마전 캔사스에 사시는 어느 분과 잠깐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분이 묘사하는 캔사스의 풍경이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도 캔사스의 초원과 언덕을 사랑하는 그 분의 진심이 느껴져서 내가 그동안 서부지역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동경심 때문에 미국 대평원에 대해서는 마음의 눈을 감고 달렸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우리가 여행을 다니면서 진짜 멋지다, 스펙테클러 하다고 말하게 되는 풍경은 많이 봤지만 참 평화롭고 아름답다 하고 느낀 적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대자연의 거대함과 장엄함은 우리를 압도하고 긴장하게 만들었지 우리를 느긋하고 편안하게 해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분이 캔사스의 초원을 묘사하며 '아름답다'고 하셨을 때, 대평원이 포함하는 열 개의 주 중에서 그동안 여덟개 주를 거쳐 왔으면서도 한번도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내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오전엔 날이 흐려서 좋더니 네브라스카 들어서면서부터 날이 활짝 개어 강렬한 오후 햇빛을 그대로 받으며 달려야했다. 마지막엔 지는 해가 너무 뜨거워 콜로라도 동부의 붉은 황무지가 더욱 더 타는 듯이 느껴졌다. 몇 년 전 와이오밍 동남부를 달리며 느꼈던 것과 비슷한 뭔지 모를 불편함이 밀려왔다. 800 마일 (약 1,300 킬로미터), 12시간을 넘게 달렸으니 지칠만도 하다.
하루종일 달려 도착한 평원의 끝은 콜로라도의 덴버 (Denver). 저 멀리 눈덮힌 록키산맥이 보이자 심드렁하던 자두도 신이 났다.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쾌적하게 하기 위한 첫번째 준비물은 차창 가리개다. 2006년 우리의 첫 대륙일주 때 호되게 당한 이후로 뒷 좌석 차창만큼은 열심히 가려주는데 이거저거 다 써봐도 영 마음에 드는게 없어 고민하다 이번에 나름 괜찮은 거 하나 개발해봤다. 바로 벨크로 (Velcro) 라고 하는 소위 찍찍이 테잎을 이용한 것이다. 이 벨크로를 차창과 창문 크기의 천 조각에 각각 붙이고 햇빛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수시로 떼어서 붙이니 너무 편하고 빛 차단도 잘 되서 효과 만점이었다. 칭찬 잘 안하는 수형이 인정했으니 뿌듯하기까지. 이 다음에 차창에 붙인 벨크로를 떼어낼 생각일랑 지금은 잊어버리삼.




호텔에 도착할 무렵 차창은 곤충들의 잔해로 온통 처참하게 얼룩져 있었다. 여행기를 읽어보며 나도 모르게 자꾸 모니터 스크린을 문질러 닦게 된다는. 이번 여행 동안 우리 차에 부딪혀 객사한 곤충들이 아마 몇 천 마리는 될 것 같다. 위충제라도 지내야 하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어쨌든 오늘이 여행 기간 중 제일 많이 달린 날이다. 오늘을 잘 버텨냈으니 남은 날들은 이보다 낫겠지 싶어 안도감이 들었다. 호텔에 들어가 침대에 내려놓으니 호두가 신이 났는지 정신없이 기어다니는데, 미안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참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