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5 | 모처럼의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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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고원 지대를 통과하고 아이다호에 진입하면서 록키산맥 권역으로 들어섰다.
아이다호 웰컴 표지판을 먼저 찍고 나서 유턴해 돌아오면서 워싱턴주 웰컴 표지판을 찍었다. 진짜 워싱턴주 웰컴 표지판 찍으려고 아이다호와 워싱턴주를 몇번을 왔다갔다 했는지 모른다. 오레건주도 그렇고 워싱턴주도 그렇고 주 웰컴 센터를 찾지 못해 기념품인 지도를 구하지 못했는데, 안타깝게도 주의 재정 사정이 썩 좋지 못해 기존에 있던 웰컴 센터를 폐쇄했다고 한다.
사정이 어렵기는 아이다호주도 마찬가지.
아이다호 웰컴 센터 자리에 서있는 저 작은 트레일러는 참전용사들이 운영하는 무료 카페다. 독립기념일을 기념해 오고 가는 객들을 위해 무료로 커피와 쿠키를 나누어주고 또 모금도 받는다. 예전에 메모리얼 데이에 나이아가라에 다녀오는 길에도 휴게소에 저렇게 소형 트레일러를 세워놓고 커피와 쿠키를 주시는 연세 드신 어른들을 많이 뵐 수 있었다.
그냥 몰래 먼 거리에서 살짝 찍으려던 것이 할아버지에게 포착되서 나중에 확대해보니 할아버지의 눈이 어찌나 무섭던지.
아이다호와 몬타나를 달리는 길은 시원하게 피어오르는 뭉게 구름과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풍경 덕분에 참 기분좋은 드라이브였다. 더구나 오늘은 일정도 400 마일 (650 킬로미터) 거리를 달리기만 하면 되는 모처럼 '여유있는 날' 이라 달리는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솔직하게 말하면 씨애틀에서부터 옐로스톤까지의 일정이 좀 꼬이는 바람에 예약해놓은 호텔을 취소할 수 없어서 생각지도 않게 널럴한 하루가 되어 버렸다. 맘 속으로는 씨애틀에서 제대로 못봐서 아쉬운 마음, 또 다음 날의 빡빡한 일정 때문에 가슴치며 통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저 산의 사면에 쓰여진 M 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M 말고도 곳곳에 여러 알파벳들이 한글자씩 산사면에 쓰여져 있었다. 궁금해 돌아가실 지경이라는.
도저히 알아내지 않고는 못 배기겠네. 네티즌 수사대 버금가는 실력 발휘해볼까.
역시 잉여력 쩌는 조여사, 알파벳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았다.
Hillside Letters 또는 Mountain Monograms 이라는 저 알파벳들은 미국 서부에서 흔하게 보이는 일종의 지역 상징으로 학교 간 시합에서 이긴 고등학교가 학교의 승리와 명예를 상징하기 위해 새기거나 대학 중에는 유씨 버클리 대학이 1905년에 언덕에 크게 C 자를 새겨 넣은 것을 계기로 다른 대학들에 유행처럼 번져나가, 학교나 지역의 상징으로 1920-1930년대에 우후죽순처럼 설치 되었다고 한다. 현재 약 500 개 정도가 남아 있는데 최근까지도 새로 새겨지기도 하고 반대로 많은 경우 관리 소홀, 심미적, 환경적 이유 때문에 제거되기도 한단다.
주나 도시에 진입할 때 보이는 웰컴 사인 같은 지역 상징물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나는 내심 군사적인 의미가 있는게 아닌가 했는데, 재미있는 유래를 가지고 있군. 허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 문자 반댈세.
록키산맥을 넘어가는 길이지만 와이오밍 분지 지역이라 그런지 산세나 도로가 험하지 않았다. 거칠고 억세 보이기만 한 침엽수들이 초여름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색을 띄다니.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이곳의 드라이브가 마냥 좋기만 했다.
늘 달력 넘어가기 직전에 도착해서 겨우 잠만 자고 나오다가 오늘은 처음으로 호텔 수영장을 다 이용해봤다. S 선배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진짜 우리처럼 여행을 멋없고 재미없게 다니는 사람들도 없을거다. 언제쯤 제대로 느긋하게 즐기는 여행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열여섯번째 날 : 다시 찾은 엘로스톤에서의 공포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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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90 를 타고 가다 리빙스턴 (Livingston) 에서 나와 US89 를 타고 가디너를 통과해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북서쪽 입구로 들어갔다. US89 도로가 나름 대단한 것이 록키산맥의 서쪽 경계 지역을 따라 달리며 옐로스톤과 솔트레이크 시티, 자이언, 브라이스 캐년을 거쳐 그랜드 캐년까지 도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들어서는 입구부터 신비하고도 장엄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국립공원도 없을거다.
이곳도 평균 고도 2,000 미터가 훌쩍 넘는 지역이라 능선 부위에는 겨울 눈이 아직도 녹지 않고 있었다.
2007년 옐로스톤 여행 때 미처 돌아보지 못한 지역 위주로 돌아보기로 하고 처음으로 맘모스에서 타운 폴스 구간을 달렸다.
산과 숲, 야생화가 어우러진 어쩌면 옐로스톤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이었다.
산의 사면에 피어있는 야생화들. 고산지역에서 야생화를 보기 가장 좋은 시기는 7월 중순이다. 2007년에는 3주 늦게 와서, 2010년에는 3주 일찍와서 야생화 가득한 풍경을 놓쳤다. 한때 전공했던 친구들이라 그런지 여행 다닐때마다 꽃들을 찾게 되는데 영 운이 안따라준다. 아직 절실하지 않기 때문일까.
첫째도 날씨, 둘째도 날씨, 셋째도 날씨다. 그리고 날씨는 운이다.
어젯밤에 갓 내린 듯한 싱싱한 7월의 눈이다.
타운 폴스에서 캐년 지역으로 넘어와 에전에 보지 못한 로어 폴 (Lower Falls) 를 보러왔다. 겨우내 쌓인 눈이 녹아 내려 더 웅장한 폭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뭐가 좋은지 뱃살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호두.
옐로스톤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바이슨 (Bison: 버팔로) 무리. 동네 마트에서도 바이슨 고기를 파는 걸 보고 놀랐는데 맛이 소고기와 비슷하다고.
한가로운 평원의 풍경. 지금의 여유와 평온함이 하루의 끝에 어떤 공포를 가져왔는지 짐작도 못했다.
2007년에는 완전히 지나쳐갔던 웨스트 썸 (West Thumb) 지역. 노리스 지역보다 훨씬 다채롭고 아름다운 가이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곳의 향기를 자두가 표현하고 있다.
여러가지 미생물의 활동으로 가이저들은 각각 고유의 색을 띄게 되고 이는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한다.
수영도 못하는 내가 풍덩 다이빙하고 싶을 정도로 맑고 아름다운 가이저.
한번 왔던 곳이라 삼 년만에 왔는데도 크게 낯설지는 않았다. 하루 일정으로 돌아보고 베어투스 하이웨이 (Beartooth Highway) 를 타고 넘어갈 생각에 바쁘게 바쁘게 움직였다. 덕분에 맘모스에서 노리스 구간을 제외하고 공원 내 모든 도로를 다 돌아보기는 했는데.
문제는 일몰의 야생천국.
2007년에는 해질녘이면 바로 숙소로 들어가는 바람에 이 시간이 이렇게 분주하고 액티브한 시간인 줄 미처 몰랐다.
이건 뭐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짐승들 때문에 정신을 못차릴 지경.
심지어 2007년에는 겨우 먼 발치서 잠깐 보았던 곰들도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바람에 완전히 발목 잡혔다. 빨리 공원에서 나가야 하는데.
특히 이 놈. 분명히 하룻강아지임에 틀림없다.
도로 중앙을 한참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결국은 파크 레인저 아저씨에게 야단맞고 그제서야 제갈길 가버린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의 미국여행 5년사 중 제일 위험했던 순간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갑자기 온몸에 소름돋는다.
일단 애초부터 무모했던 우리의 이날 일정. 아침에 몬타나 보즈먼 (Bozeman) 에서 출발해 90 마일을 달려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도착, 옐로스톤을 돌고 오후에 동북쪽 입구로 나가 오매불망 기다렸던 베어투스 하이웨이 (Beartooth Highway) 를 타고 몬타나 빌링스 (Billinigs) 까지 가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2007년에 베어투스 하이웨이를 달려보려고 코디 (Cody) 에서 일부러 돌아돌아 하이웨이 초입까지 갔다가 자두가 멀미를 하는 바람에 그냥 접고 옐로스톤을 돌아왔던 dkvma이 있어 이번엔 꼭 목적을 이루리라 굳게 결심했다. 결심했으면 제대로 지켜야지, 해지는거 뻔히 보면서 베어투스로 들어가는 무모함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
나도 정말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람이 한가지 목표에 너무 몰두하다보면 정상적으로 사고가 안되는 모양이다. 베어투스 하이웨이는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닉 하이웨이,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도로지만 5월까지도 폐쇄하는 위험한 길이기도 하다. 그 위험천만한 길을 경치도 볼 수 없는 깜깜한 밤에 건너겠다고 나섰으니.
여튼, 해질 무렵에 옐로스톤의 동북쪽 입구를 빠져나와 베어투스 하이웨이 초입에 들어서니 완전히 밤이 되었다. 그 전까지만해도 우리를 앞서가던 두대의 차가 코디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지나면서 자취를 감춰버리고 우리밖에 남지 않았다. 거리 계산하려고 켜둔 네비게이션은 연신 '되돌아가시오 (Turn around when possible)' 를 부르짖고 가뜩이나 불안한 마음에 공포를 불어넣었다.
갑자기 사슴 출몰, 놀란 가슴 진정시키며 수형이 바짝 긴장했다.
이번엔 엘크가 차를 덮친다, 크게 S 자 돌며 위험천만한 순간을 넘기자 이젠 정말 몸까지 굳어버릴 것 같은데.
앞뒤로는 작은 불빛도 볼 수 없었다. 하긴 그런 오지에서 밤 10시에 다니는 차가 있을라고.
본격적으로 산길을 오른다. 주변이 전혀 보이지 않지만 구불구불 위험한 1차선 산악도로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한쪽 옆은 낭떠러지. 다행히 피곤한 아이들이 어느새 잠이 들었다. 호두가 칭얼거려도 문제지만 유난히 걱정많은 자두가 사태를 알게되면 엄청 긴장할게 틀림없다.
그런데 어머나, 도로 공사 중인가보다. 공사 중인 산악도로를 달린다. 속도를 바짝 낮춰 달린다.
왠지 주변이 훵한 기분이 드는게 산의 능선부위에 오른 것 같았다. 순간 말문이 막힌 우리 부부. 설마, 이게 눈???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솔직히 참 암담하고 무서웠다. 이게 무슨 일이냐, 이런 길을 달리는데 눈이라니.
눈발 날리는 베어투스 하이웨이의 능선을 기어가듯 달리며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도 의연하게 운전대 잡고 버텨주는 수형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이제 산 넘어 나오는 타운까지 30 마일 남았다.
공사구간이 끝나면서 눈앞에 나오는 주경계 표지판. 그렇게 찍고 싶었는데 못 찍었던 몬타나와 와이오밍 웰컴 표지판을 이런 곳에서 찍게 될 줄이야. 이런 초일급 위험상황에 돌려가며 표지판을 찍는 날 보고 수형이 한마디 한다.
'니가 기자냐.'
솔직히 주 경계 표지판을 보면서 마음의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일단 현재 위치 파악이 되니까 그게 안심이 됐다.
경계를 통과하니 이번엔 내리막길. 눈도 그치고 공사구간도 끝났다.
혹시나 다시 튀어나올지 모를 동물들에 대비하여 긴장을 늦추지 않고 달리다보니 어느덧 산을 거의 다 넘은 것 같았다. 차창을 열고 하늘을 봤다. 하, 별이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에는 별들이 수만개. 피식 웃음이 났다.
우리랑 인연이 없나보다고 하기엔 내 책임이 너무 크다. 칼을 뽑으면 허공에라도 휘둘러대야 직성이 풀리는 이놈의 성미.
당시엔 베어투스 하이웨이와 우리가 인연이 아닌데 우리가 자꾸 억지로 가려고 하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게 아닐까, 산이 우리를 받아주지 않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무모한 나의 도전에도 무사히 넘어가게 해준 산이 고맙기만 하다. 수형이 고맙기만 하다. 그지같은 주인 만나 고생하는 우리차 시빅이가 고맙다.
숙소가 있는 빌링스에 도착하니 새벽2시.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2010년 옐로스톤에서의 추억이다.
아래의 2007년 옐로스톤 국립공원 총정리편과 함께 읽으시길.
아래의 2007년 옐로스톤 국립공원 총정리편과 함께 읽으시길.
2007 옐로스톤 총정리 | My Own Complete Yellowstone Tour Gui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