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 2011년 5월 27일 |
다 큰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씩 하는 장난이 있다. 얼음 덩어리에 뜨거운 물붓기. 얼음이나 단단하게 얼어붙은 눈 위로 뜨거운 물을 부으면 빠른 속도로 녹아 내리기 시작하는데, 단번에 스르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부위에 따라 녹는 정도가 달라서 예측할 수 없는 기괴한 모양을 만들곤 한다. 나와 비슷한 천진난만함이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은 알리라.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 (Bryce Canyon National Park) 에 도착해 후두 (Hoodoo) 가 만들어내는 전세계 유일무이한 장관을 보자마자 난 바로 누군가 이곳에 뜨거운 물을 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경우엔 뜨거운 물보다는 부식성 강한 소금물이 더 어울릴 듯 싶지만.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은 바로 이 후두의 캐년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후두 지역만을 포함하기 때문에 공원도 남북으로 좁고 길게 뻗어있다. 물론 후두 너머의 지역은 아까 우리가 지나왔던 Grand Staircase / Escalante National Monument 와 딕시 국유림 (Dixie National Forest) 로 역시 보호지역이다.
일출에서 일몰까지 다양한 작품을 상영하는 극장 같다고 해서 브라이스 극장 (Bryce Amphitheater) 이라고 이름 붙인 이 지역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는 공원 내에 대여섯군데가 있다.
그랜드캐년 국립공원 (Grand Canyon National Park) 도 처음 본 순간은 몸이 저릿할 정도로 압도되어 놀라움을 금치 못하지만 전망대를 따라가며 30분만 보고 나면 다 똑같아 보인다고 하듯이, 브라이스 극장의 여러 전망대들도 결국 보여주는 것은 한가지, 후두 캐년이다. 하지만 햇빛의 방향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영상을 더 아름답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시간에 맞춰 적소에 도착하는 것이 좋을 듯.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 지도는 여기
사람들의 선택에 약간의 도움을 주기 위해 전망대의 이름을 선라이즈 포인트 (Sunrise Point), 그리고 선셋 포인트 (Sunset Point) 라고 붙여주긴 했지만 내가 찾아본 리뷰들에서는 일몰을 보기 제일 좋은 장소는 선셋 포인트 보다는 인스퍼레이션 포인트 (Inspiration Point) 라고 한다.
미국 국립공원을 다니면서 인스퍼레이션 포인트라는 전망대를 여러번 봤는데, 하나같이 그 국립공원에서 가장 최고의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인스퍼레이션 포인트는 감동 보장 포인트라는 매우 중요한 팁!
인스퍼레이션 포인트에서 노을을 보겠다고 덜덜 떨고 있는데, 거창한 장비를 잔뜩 짊어지고 나타난 한 사진작가가 우리가 서있던 곳 근처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앗싸' 하면서 아저씨 바로 옆에 붙어 해지는 후두의 장관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지금 눈앞의 장면도 너무너무 아름다운데 지는 해가 극장 전체를 물들어버리면 그땐 나 기절할지도 몰라.
근데 어찌된게 아저씨의 손이 바빠지질 않는다. 해가 다 넘어가도록 겨우 몇장 철컥 찍고 나더니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것이, 벌써 철수하시는겨? 오늘 꽝난겨?
아저씨가 떠난 후로도 혹시나하고 기다렸지만 주위는 이미 어둑어둑.
일출을 볼 자신이 없어서 일몰이라도 보자고 기다렸는데, 오늘은 하늘이 아름다운 일몰을 허락하지 않으시려나보다.
일몰도 못보고, 게을러서 별도 못보고, 당연히 일출도 못봤지만,
하이킹은 꼭 해보리라. 덴버 한국마트에서 산 냉동만두를 모조리 다 삶아 먹고는 부리나케 브라이스 캐년을 다시 찾았다.
우리가 선택한 것은 썬라이즈 포인트 (Sunrise Point) 에서 퀸스 가든 트레일 (Queens Garden Trail) 을 타고 나바호 루프 (Navajo Loop) 의 월스트리트 (Wall Street) 로 올라오는 2.4마일 (3.8킬로미터) 짜리 트레일이다.
오늘도 자두는 암것도 모르고 따라 나섰다. 아치스에서 3마일짜리도 거뜬히 해냈는데 2.4마일짜리는 껌이지 않을까.
퀸스 가든 트레일. 올라올 때 생각 못하고 신나게 내려간다. 호두도 최대한 걸려보자.
산길을 내려오다보니 미로같아 보이는 후두의 주름진 계곡이 눈앞을 메운다.
이 지역도 고도 2,400미터가 넘는 고지대. 전망대와 공원 내 도로를 기준으로 했을 때 콜로라도 고원 지역의 캐년들 중에서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의 고도가 제일 높다. 어제 일몰을 기다리면서 애들이 추워했던 것도 당연하다. 구글 어스를 보면서 대충 파악해보니,
브라이스캐년 국립공원 (Bryce Canyon NP) 약 2,400 미터
그랜드캐년 국립공원 (Grand Canyon NP) 약 2,100 미터
캐년랜즈 국립공원 (Canyonlands NP) 약 1,800 미터
자이언 국립공원 (Zion NP) 약 1,500 미터
아치스 국립공원 (Arches NP) 약 1,400 미터
같은 시기에 여행했을 때 아치스 국립공원이 유난히 덥게 느껴진 것도 고도의 영향이 컸을 듯 싶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던 후두를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다. 여행 출발하기 며칠전까지도 트레일이 오픈하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보기에도 위태위태한 바위 덩어리들이 많은데 겨울을 나고 눈이 녹는 계절이 되면 무너져 내리는 후두들도 곧잘 생기는 모양이다.
반도 안왔는데 어느 틈에 호두는 잠이 들었다. 저렇게 어릴 때는 집에서 노는게 최곤데, 이렇게 끌려다니고 저런 모습으로 잠이 들고, 참 미안하다. 좋은 곳을 다녔어도 본인은 기억나는게 하나도 없을테니 어쩌냐, 너를 조금만 더 일찍 낳아줄 것을.
아치스의 붉은 바위들은 산타페의 어도비 양식을 연상시키는 매끄럽고 둥글둥글한 형태였다면, 브라이스 캐년의 후두들은 거대한 바닷가 모래성이다. 뾰족하고 표면도 거친 모래성 사이를 지나간다.
이렇게 짙은 하늘색은 또 처음 본다.
길 잃어버리기에 딱 알맞은 미로들이다. 바위 표면이 거칠어 타고 올라가긴 좋겠지만.
내리막길과 평지라고는 하지만 이미 1.5마일 이상을 걸었다. 슬슬 지쳐가는 자두양.
저놈의 브이는 도대체 언제까지 그릴지.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어줬는데도 아직도 사진 찍을 때면 맘에 안드는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너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여달란 말이다.
학기말이라 담임 선생님이 그동안 찍어준 사진들을 가져왔는데, 하나같이 브이. 평화의 전도사인줄 알것다.
뾰족뾰족한 첨탑을 지나는 모녀. 왠지 자두가 내 손에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부녀의 뒷모습처럼 아름답지는 않다.
나무를 뿌리채 뽑고 있는 무시무시한 소녀. 학교 다녀오면 가방 팽기치고 밖에 나가 신나게 놀아재끼는데 부르지 않으면 다섯시간도 거뜬하다. 진짜 깜짝 놀랐다는. 하도 도도하고 새침해서 도도자두라고 통하던 자두가 저렇게 톰보이가 될 줄이야. 솔직히 내가 바라던 모습이긴 한데 절대로 내가 일부러 저렇게 키운건 아니라는 점. 그래서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지 몰라 기대반 염려반.
후두 계곡에서 활엽수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거의 폰더로사 파인 (Ponderosa Pine) 이라는 소나무가 우점하고 있었다.
선셋 포인트로 돌아가는 마지막 관문이자 트레일의 하이라이트인 나바호 루프의 월스트리트 입구다.
좁은 통로를 지나 햇빛이 들어오는 곳으로 나가면,
왠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분위기.
하나는 업고, 하나는 (달래서) 걸리며 고생하는 수형.
꼭대기까지 이어지는 엄청난 지그재그의 연속. 나 태어나서 이런 길은 처음 가보오.
우리가 지나온 길.
고층빌딩 운집한 월가와 비슷하다고 해서 월스트리트라고 이름 붙인 이 트레일은 자연정복의 인간승리를 표출한 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놀랍고 놀라운 길이었다.
어떻게 이런 경사에 길을 낼 생각을 했을까. 계속해서 위를 쳐다보고 있다가는 뒤로 넘어갈 것 같이 현기증이 난다.
인간이 만들어낸 길 때문에 더 대단해보이는 나바호 루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올라가는 것은 트레일을 시계방향으로 돌아달라는 공원 측의 권고사항 때문. 우리가 갔을 때 나바호 루프의 다른 코스인 Thors Hammer 는 임시로 폐쇄된 상태였다.
올라올 때도 힘들었지만 다 올라와서 내려다보니 이건 진짜 경악할 수준의 길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 기분 너무 좋았고 정말 뿌듯했다. 아래에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보이던 자두도 본인 말로 에너지를 다시 얻은 것 같다나.
아까와 같은 풍경이지만, 후두 사이를 헤매다 온 지금 다시보는 이 경치는 왠지 달라보인다.
출발은 선라이즈 포인트에서 했지만 도착은 선셋 포인트로.
다시 선라이즈 포인트로 가기 위해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중.
참 일찍도 나온 공원 간판.
우리의 브라이스 경험은 이게 끝이다. 레인보우 포인트로 가는 길에 어렵사리 피크닉 포인트를 찾아 점심을 먹고 자이언 국립공원을 향해 출발이다. 우리에게 국립공원 여행의 참맛을 선사해준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