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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여행/2011

제68편. 그랜드써클 제4부: 두 번 찍었더니 넘어가는 나무 (Arches National Park, 2011/05)

DAY 3 | 2011년 5월 25일
Cortez, CO - Arches, NP - Canyonlands NP - Moab, UT


아치스 (Arches), 두번째 문을 두드리다. 열리다. 평소엔 4차원 아줌마라도 여행을 떠날 땐 객기를 집에다 두고 와야 하는데, 그릇된 열망이 욕심을 낳고 욕심이 객기로 이어지는 바람에 낭패를 본 적이 있다. 한번은 베어투스 하이웨이 (Beartooth Highway) 에서, 그리고 이곳 아치스 국립공원 (Arches National Park) 에서.




코르테즈 (Cortez) 에서 US491 을 타고 달린지 얼마 안되서 유타주로 넘어왔다. 진짜 이렇게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참으로 감개무량이오.




도대체 저것의 정체를 모르겠다. 자연이 빚은 것인지, 인간이 만든 것인지. 너무 뜬금없이 나타난 눈에 확 띄는 놈이라 그동안 엄청난 카메라 세례를 받았을 듯. 유타주의 스테이트 로드의 상징인 벌집문양처럼 생겨서 잠시 헛갈렸다는.




기막힌 장소에 자리잡고 있는 관광지. 예전에 몬타나주를 달리면서도 느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이 넓은 땅들이 다 임자있는 땅이라는게 신기하다. 어떻게 해서 이 땅을 가지게 되었을까. 예전에 니콜 키드먼과 톰 크루즈가 나왔던 'Far and Away' 라는 영화에서처럼 요이땅하고 미친 듯이 달려가서 깃발 꽂고 쟁취했을까?




모압 (Moab) 을 지나 유타 128 번 도로를 만나는 곳. 작년에는 이 128 번 도로를 타고 아치스로 입성했었지.




콜로라도 리버 (Colorado River) 를 건너면서 경사 급한 커브를 돌면 바로 오른쪽으로 아치스 국립공원이 나온다. 입장료를 내고 비지터 센터를 패스하면 바로 지그재그 오르막길.




150 미터 정도를 올라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광활한 벌판.




기암괴석 사이로 기막히게 닦아놓은 도로를 달린다. 하지만 길 오른편으로는 눈 둘 곳 없는 허허벌판. 다시 만나 반갑구나, 오늘은 제대로 봐주마. 사진의 중간 왼편으로 서있는 암석들은 'The Three Gossips'




주위의 모든 경관들을 무덤덤하게 지나치며 우리가 향하는 곳은,




오매불망하던 델리키트 아치 트레일 (Delicate Arch Trail). 작년에는 로어 뷰포인트 (Lower Viewpoint) 에서 코딱지만한 델리키트 아치를 보고 돌아서야 했는데 오늘은 눈앞에서 보리라 작정하고 왕복 3 마일 (4.8 킬로미터) 의 쉽지 않은 트레일을 시작했다. 자두 앞에서 '3 마일' 이라는 말을 꺼내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모르고 걸으면 다 걷게 되어있스.




작년에 아치스에서 한낮의 뜨거운 맛을 제대로 본 터라 이번엔 시간 낭비하지 않고 바로 트레일을 시작했다. 델리키트 아치의 장관을 보기에 제일 이상적인 시간은 일출과 일몰 무렵이지만 애들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우리는 애들 보채지 않는 시간이 제일 이상적인 타임. 아빠 등에 업혀있는 호두에게는 칸쵸라는 알약 처방이요. 10분에 한알씩 투약.




지루했던 평지가 끝나고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한다. 등반으로 올라가는 높이는 146 미터. 그래도 경사가 완만한 편이라 생각보다 힘들지 않다. 바위산의 모양은 예전에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옴스테트 포인트에서 본 화강암 바위 같은데, 색깔이.. 색깔이.. '이뻐..'




열심히 올라가는 부녀 + 매달린 아들




바위산에서도 생명을 이어가는 관목들. 물을 찾아 떠나는 뿌리의 길고 긴 여행.




이놈의 델리키트 아치가 어디에 꽁꽁 숨어 있는건지. 멀리서라도 볼 수 있다면 가는 길에 힘이 되련만.




배낭 대신에 아들을 업고 가는 수형의 뒷모습.




'엄마, 너무 힘들어. 도대체 얼마나 가야하는거야.' '내가 아까 3 마일이라고 안했나?'




드디어 델리키트 아치가 나타났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바위에 가려 안보이다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래서 그렇게 꽁꽁 숨어있었구나, 가슴 철렁하는거 보고 싶어서.




작년에는 요렇게 보이던 것이,




실제보니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작년에 멀찍이서 보고는 별거 아니네 했지만, 하도 유명해서 직접 납시었더니 정말 안왔으면 엄청 후회했을거 같다.




아치 밑에 앉아있는 개미들은 자두와 나. 여기서 보기엔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생각보다 주변 경사가 심해 정말 덜덜 떨면서 저 밑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던지 무서워서 서있지도 못했다는.




수형은 호두를 업었으니 절대 아치로 넘어가서는 아니되오.




어떤 힘으로 지탱하고 있길래 주위가 다 떨어져 나가도록 버티고 있을까.




아치가 있는 곳은 평지가 아니라 노천의 원형극장같이 경사가 제법 심한 지형이다.




아치의 반대편은 이렇게 생겼다. 이 원형극장은 매일같이 공연하는 일출과 일몰의 장관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관객을 위한 자연의 선물.




바람불어 쓰러질라, 메마른 우리 딸. 벅찬 가슴안고 내려오는 길은 일사천리. 날씨도 아이들도 모두 협조한 덕분에 왕복 두시간이 안걸렸다.




일찌감치 숙제를 끝내고 나니 마음이 뿌듯하고 홀가분하다. 이젠 윈도우를 찾아서 간다.




업혀만 다니던 호두도 이번엔 걸어보겠단다.




질투와 다툼, 소심한 복수가 난무하는 우리집 일상생활에서는 매우 보기 어려운 아주 훈훈한 광경.




윈도우 아치의 천정에 가로로 틈이 있는데 그 사이에 박혀있는 돌들이 떨어질까 살짝 겁이 났다.




윈도우의 아치 아래에서.




터렛 아치 (Turret Arch). 노스 윈도우 (North Window) 를 통해 보는 터렛 아치는 인기있는 촬영 구도. 우린 몰라서 못찍었지만.




이정표 사진은 여행기를 쓰는데 꼭 필요한 기억창고 열쇠.




사우스 윈도우와 노스 윈도우 아치. 수형과 호두가 살린 사진.




사계가 공존하는 풍경. 5월이 보여주는 그랜드 써클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여행 내내 우리를 사로잡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조화였다.




다음날 아침, 지금 향하는 곳은 '악마의 정원 (Devils Garden)' 순진한 자두는 '악마' 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동차로 갈 수 있는 아치스 국립공원의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Devils Garden Trail. 더블 오 아치 (Double O Arch) 같이 유명한 아치들이 모여있는 트레일이지만 제대로 보자면 걸어가야 하는 거리가 만만치 않아 우리는 랜드스케이프 아치 (Landscape Arch) 까지만 가기로 했다.




작년에는 같은 길을 10분도 못 걷고 돌아와야했다. 그릴 위의 소세지가 되는 것 같아서. 자두의 표현에 따르면 'You must learn a lessen' 을 제대로 하는 바람에 아치스의 일정은 모조리 오전으로만 잡았다.




땅을 보며 걷는 수형이 기계적으로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건 왜일까. 아침 기온은 제법 낮은 편이라 다리가 드러난 호두의 알살을 내 남방으로 덮어주었다.




여전히 땅을 보며 걷는 수형. 군장메고 행군하는 군인도 아닌데.




둥글둥글한 바위들을 보면서 뉴멕시코 산타페의 어도비 건물들을 떠올려본다.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아치스에서 영감을 받았나.




난 시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는 시구를 참 좋아한다. 나는 대학원에서 식물분류학을 전공했다. 학문에 대한 열정은 없었고, 그냥 산을 누비며 야생화를 보고 다니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야생화가 좋아진 계기는 과사람들과 매년 두번씩 떠나던 채집여행이었다. 등산을 하며 식물분류학을 듣는 학생들은 꽃을 채집해서 표본을 만들고, 이름을 외워야 하는 과제를 수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나는 참 신기한 경험을 했다. 색깔도 모양도 크기도 모두 다른 산속의 꽃과 나무들이, 처음엔 이것도 꽃, 저것도 꽃, 그저 꽃에 불과했는데, 신기하게 해를 거듭할수록 내가 이름을 알게 된 꽃들은 눈에 확 띄는거다. 시력이 좋아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름을 알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그 꽃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면서, 야생화가 친근해지고 알고 싶어지고 또 보고 싶어졌다. 난 그저 이름을 알았을 뿐인데. 그 때 알았다. 이름이라는게 얼마나 중요한건지. 이름이 없는 존재는 무의미하다. 이름을 가진 존재는 특별하다. 이름을 알게 된 존재는 나에게 특별해진다. 그래서 내가 전공한 식물분류학은 이름이 없는 존재를 명명하는 과정, 진화적 가계도를 그리는 과정. 물론 이름이 없는 식물은 열대우림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지만.




이렇게 주저리 떠들게 된 이유는 아치스의 바위들 때문이다. 이름이 붙은 바위나 아치들, 이름을 모르는 바위나 아치들, 이름이 없는 바위나 아치들. 각각을 대하는 간사한 나의 눈과 마음이여. 이름을 모를 때는 그냥 지나치던 바위가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갑자기 달라보이는 건 뭐니. 무지몽매한 중생이여. 이름을 붙일 줄 아는 모든 이들을 존경한다.




드디어 나타난 랜드스케이프 아치 (Landscape Arch). 머지 않은 미래에 아치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수형은 아치스가 좋았단다. 기억에 남는 것은 붉은 바위와 파란 하늘의 선명한 대비.




자두도 좋았단다. 돌들의 모양이 다양해서 좋았고, 핫 써머의 히트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단다. 그때는 덥다고 빨리 가자고 했으면서.




여행에 대한 기억은, 사람마다도 다르지만, 한사람이 느끼는 기억도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거 같다. 힘들었던 순간이 더할 수 없이 소중한 기억으로 남기도 하고, 강렬했던 인상이 무덤덤해지기도 하고.




바위 한가운데 저렇게 뚫린 구멍들은 물에 스르르 녹아버린 것 같아 보인다. 얼마나 닳고 닳았으면 저렇게 둥글둥글 변했을까. 닳고 닳아 둥글게 변한 이야기를 하니까 생각나는 수형에 대한 에피소드. 예전에 학교 아파트 살때 공용 세탁실이 일층에 있었는데, 세탁이 끝난 빨래를 건조기에 넣으려고 갔더니 빨래에 온통 구멍 투성이. 빨래를 꺼내고 보니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세탁기 안에 가득. 빨래를 넣은 수형을 취조한 결과 세제를 넣은 유리병까지 몽창 세탁기 안에 넣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빨래를 하나씩 넣은게 아니라 바구니채로 부어버렸겠지요. 그 유리조각들이 세탁기 안에서 얼마나 굴렀는지 그 끝이 다 마모되서 둥글둥글 해졌다는. 그리고 난 억만년전 그 스토리를 아직도 울궈 먹고 있다는.




[2010년 사진] 작년에 유일하게 제대로 본 아치인 스카이라인 아치 (Skyline Arch)




[2010년 사진] 작년에 지나가는 길에 슬쩍 본 Balanced Rock. 어떤 사람은 이를 '남근상' 이라고 부르고 싶어했다는.




내 눈에 비친 아치스는, 내가 가졌던 기대에 부응하기위해 자연스럽게 우러나지 않는 감동을 조금은 억지스럽게 불러 일으켜야 했던 곳이다. 다녀온 사람들은 누구나 미국 최고의 국립공원으로 손꼽는 곳이고, 또 내게도 델리키트 아치는 정말 오랜만에 '헉' 소리 날 정도로 대단한 곳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밖의 아치들도 자연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조형물이라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었지만, 이 조형물들이 왠지 생뚱맞게 배치되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치스의 아치와 바위들은 자연의 풍파속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최후의 생존자. 바람이 깎아내고 물이 씻어내린 끝에 마지막으로 단단한 뼈대만이 남았다. 오랜시간 참 모질게 많이도 깎아냈구나. 그래서 그런걸까, 자연의 조각품을 전시하는 이 미술관에는 전시품이 너무 없다. 각각의 아치들은 자체로는 훌륭한 예술작품이지만 허허벌판에 어색하게 자리잡고 있는 느낌이다. 감히 자연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평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매불망 기다려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온 이곳에서 기대만큼의 감동을 느끼지 못했기에 느끼는 당황스러움을 어떻게 해서든 설명해보고자 하는 노력일뿐. 자, 이젠 그랜드 써클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를 신나게 달려갈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