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 | 2011년 5월 24일 |
비록 한없이 작은 반도의 땅이지만 이천년 역사를 이어온 뼈대있는 나라에서 왔다는 자부심. 이 자부심은 종종 가진 것 많은 힘센 나라에 살면서 나도 모르게 생겨난 열등의식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힘이요 그릇된 자존심이 되었다. 말로는 '자연이 더 좋아서' 라는 핑계를 댔지만, 역사 관광도시를 피하고 국립공원 위주로 세우는 여행계획들 이면에는, 역사없는 나라라는 비하를 서슴치 않고, 근본없는 나라라는 선입견으로 가득찬 내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가 놓치고 있던 것. 친미/반미의 감정싸움에 스스로 줏대를 세우지 못하고 생각없이 사는 동안 나도 모르게 간과했던 한가지는 바로 이 땅의 원주민.
원래. 살았던. 사람들.
미국이라는 나라는 '땅 = 민족 = 나라' 의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미대륙이라는 땅덩어리 자체가 콜롬부스 발견 이전에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 지극히 서구중심적인 발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메사버디 국립공원 (Mesa Verde National Park) 의 존재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곳이다. 아주 오랜 옛날, 미대륙 중에서도 가장 인간이 살기 어려운 보이는 척박한 불모의 땅에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던 푸에블로 인디언 (Pueblo Indians) 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된 메사버디 국립공원.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UNESCO World Heritage) 에 등재되었다는 사실은, 이 땅이 미국이라는 나라 이전에도 얼마나 활발한 삶의 터전으로 존재하고 있었는가를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럼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을 구경하러 출발이다.
사우스 포크 (South Fork) 에서 출발해 메사버디 국립공원까지는 US160 도로를 타고 간다. 특히 사우스 포크에서 파고사 스프링스 (Pagosa Springs) 까지 가는 길은 록키산맥의 큰줄기인 산후안 산맥 (San Juan Mountains) 을 그대로 가로질러 넘어가는 유명한 시닉 (Scenic) 드라이브 코스.
활엽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침엽수 일색의 식생을 보면 이곳이 얼마나 고도가 높은 곳인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구간은 고도 3,000 미터가 넘는 고산지역.
계곡을 타고, 산등성이를 돌고, 능선을 넘어가는 험준한 산악도로지만 워낙 길을 넓게 잘 내어놓아서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행히 폐쇄된 도로도 없고 도로도 깨끗한 편이었지만 능선 부위에 오르니 채 녹지 않은 눈들이 가득 쌓여있어 5월말 나그네들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보이는 곳은 아마도 스키장인듯.
울프 크릭 패스 (Wolf Creek Pass). C.W.McCall 이라는 컨츄리 가수가 부른 <울프 크릭 패스> 라는 노래 때문에 더 유명해진 이곳은 대륙분수령 (Continental Divide) 선상에 위치한 고도 3,300 미터의 지역이다.
분지에 갇혀있는 물이 아니라면 육지에서 생성된 모든 물들은 최종적으로 바다로 흘러나간다. 이 물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대륙분수령인데, 미대륙에서는 대륙분수령을 기준으로 서쪽의 수계는 태평양으로, 동쪽의 수계는 대서양과 멕시코만으로 빠져나간다.
미국의 대륙분수령은 대체로 록키산맥을 따라 형성되는데 북쪽에서부터 대륙분수령을 따라 하이킹을 하는 아웃도어맨들도 많고, 대륙분수령을 통과하는 모든 도로에는 라는 표지판이 설치되있다.
산후안 산맥을 넘고 파고사 스프링스 (Pagosa Springs) 를 지났다. 파고사 스프링스는 온천으로 유명한 관광도시다. 일정도 안맞고 숙박비도 너무 비싸 당연히 패스. 더구나 온천욕은 여행 끝에 지친 몸을 풀어주는 곳이지, 갓 출발해서 에너지 넘치는 여행객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 아닌게 아니라 8박9일의 여행 끝 무렵에는 뜨끈한 온천물에 몸을 담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는.
사진은 콜로라도의 흔한 5월 풍경.
콜로라도 남부의 유명한 관광도시 듀랑고 (Durango) 를 지나 US160 을 조금 더 타고가면 오늘의 목적지인 메사버디 국립공원 (Mesa Verde National Park) 가 나온다.
공원에 진입하자마자 보이는 거대한 븃 (Butte). 븃은 유타나 콜로라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지형으로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주변 지역과는 독립적으로 생뚱맞게 존재하는 섬과 같은 지형이다. 특징이라면 정상에서 바닥까지 경사가 절벽같이 심하고, 정상부위가 평평하다는 점.
메사버디 국립공원은 미국의 국립공원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연이 아닌 인간의 흔적을 보존/보호하기 위해 지정된 문화유적지다. AD 600 년에서 1300 년대까지 이 지역에 터전을 잡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유적만도 무려 4,000 사이트가 넘게 발견되었다고 하니 그들이 이곳에 얼마나 큰 마을을 형성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솔직히 여행기를 쓰기 전에는 이렇게 많은 유적지가 보존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드디어 도착한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고향. 그런데 이곳은 2,000 미터가 훨씬 넘는 고원과 계곡이 번갈아 나타나는 반사막의 땅이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았다고라.
구글얼스 (Google Earth) 에서 보이는 메사버디 지역이다. 줌아웃하여 보면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나는 이 지대의 특징은 북쪽의 록키산맥과 남쪽의 사막지대 사이에 나타난 고원의 메사지형이라는 것이다.
단어의 어원이 '테이블' 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메사 (Mesa) 는 아까 말한 븃 (Butte) 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편평한 고원 침식지대를 일컫는데, 이렇게 주위환경과 비교해서 보니 이 메사버디는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최선의 선택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이들은 이곳에서 700 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왔다고 하지 않는가.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는 어리석음이라며 비웃었던 자신이 부끄럽다.
비지터 센터에 있는 간략한 공원지도.
본격적으로 유적들을 찾아간다.
핏 하우스 (Pit House) 라고 부르는 이 유적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초기 주거형태로 AD600 년 경에 만들어진 것들이라 가장 원시적이다. 대부분의 핏 하우스들은 메사 탑, 즉 고원의 정상부위에 자리잡고 있다.
남아있는 것은 땅에 새겨진 흔적들이지만 사실은 낮은 지붕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특이한 점은 이렇게 단순해 보이는 집안에도 명확하게 기능에 따른 방의 구분이 있고, 특히 키바 (Kiva) 라고 종교적 공간이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AD600 년대가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말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번엔 좀 더 발전된 형태의 유적들이다. 알코브 (Alcove) 는 절벽같은 곳이 바람에 의해 침식되어 움푹하게 들어간 지형을 말하는데, 아마도 메사 탑에 지은 핏 하우스들이 자연재해에 직접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에 더 안전한 알코브 지역을 찾아 이주한 것 같다.
메사버디 국립공원에 대한 사전정보를 찾아보면서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유적지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머릿속으로 그려보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른 형태의 주거 공간과 마을들을 보면서 많이 놀랐다.
절벽과 계곡이 펼쳐진 이런 곳에,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는 것을, 보기 전에는 믿기 어렵지 않을까. 사진의 화살표가 또다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거주지역이다.
화살표가 없다면 저곳에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을 것 같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타난 클리프 드웰링 (Cliff Dwellings). AD1200 년 경에야 등장한 주거공간으로 절벽 아래 복층의 건물들을 건설한 가장 발전된 형태의 유적들이다.
이런 클리프 드웰링 (Cliff Dwellings) 은 발코니 하우스 (Balcony House) 와 클리프 팰리스 (Cliff Place) 이렇게 두 곳을 파크 레인져 인솔하에 개방하고 있다. 투어 비용은 3불 정도라 저렴한 편.
발코니 하우스는 호두를 데리고 갈 수가 없어서 클리프 팰리스 투어만 했다. 우리 앞팀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
모래와 짚들을 짓이겨 만든 어도비로 지은 작은 마을, 클리프 팰리스. 몇백년이 지났는데도 이 정도로 보존된 것을 보면 이곳이 얼마나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한 천혜의 장소인가를 알 수 있다. 물론 마을 자체도 견고하게 지었겠지만.
마을의 주위환경. 보기만해도 아찔한 절벽이다. 자연이 만들어낸 기막힌 환경과, 그 환경을 최적의 조건으로 이끌어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지혜와 기술이 놀랍다.
성스러운 장소, 키바 (Kiva)
탑 안쪽을 들여다보는 수형. 20개월짜리 호두는 어쩔 수 없이 투어 내내 업혀있어야 했다.
이 메사버디 국립공원에는 이런 클리프 드웰링 형식의 주거지역이 무려 600개가 넘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스푸루스 트리 하우스 (Spruce Tree House) 는 가이드 인솔 없이 돌아볼 수 있는 곳으로 메사버디에서 세번째로 크며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클리프 드웰링이라고 한다. 발코니 하우스나 클리프 팰리스처럼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릴 필요는 없지만 오가는 산길의 경사가 제법 급한 편이라 다녀오는데 좀 힘이 들었다.
메사 지역의 가장자리. 이곳의 황량함을 피해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메사의 계곡으로 이동해갔을 것이다.
파크 포인트 트레일 (Park Point Trail). 메사버디 국립공원에서 제일 고도가 높은 곳 (2,600 미터) .
화재로 불에 타버린 고사목들.
파크 포인트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는 전망. 앞에 보이는 눈덮힌 산맥이 록키산맥의 줄기이고, 메사 지역은 내 등 뒤로 펼쳐진다.
오늘은 코르테즈 (Cortez) 에서 숙박, 내일은 드디어 아치스 국립공원 (Arches National Park) 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