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 | 돈보다 귀한 것이 시간 2008년 11월 21일 Athens, GA - Birmingham, AL 225 miles / 360 km |
돈이 없다. 하지만 돈보다 더 없는 것은 시간. 주어진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일과가 끝난 금요일 오후에 출발했다. 한국에서는 써머타임이라고 하는 데이라이트 세이빙 (Daylight Saving) 도 끝나고 어둠이 일찍 찾아오는 11월 말. 되도록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로 들어가자고 계획했지만 오늘만은 예외가 될 것 같다. 애틀랜타 다운타운을 지나는데 벌써 깜깜한 밤이 되었다. 애틀랜타에서 I-20 으로 갈아타고 앨라배마의 버밍햄까지 달리는데 2006년 대륙횡단의 마지막 밤이 생각났다. 텍사스의 아마릴로에서부터 15시간이 넘게 운전을 하고 겨우 앨라배마 버밍햄까지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패스트푸드점에서 1불짜리 치킨버거를 하나씩 사들고 먹으면서 시간도 늦었고 몸도 피곤하니 자고 갔으면 하는 뜻을 슬쩍 내비쳤지만 그대로 묵살 당하고 집까지 전진해야했던 기록적인 강행군이었다. 225마일, 집에서 5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지만 그때 이후로는 앨라배마 버밍햄이 꼭 옆동네 같다는.
Day 2 | 서부까지 삼만리 2008년 11월 22일 Birmingham, AL - Oklahoma City, OK 700 miles / 1130 km |
본격적인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전날 밤에 버밍햄에 도착하여 프라이스 라인에서 비딩으로 예약한 38불짜리 호텔에서 가볍게 잠만 자고 나왔다. 난 매사에 즉흥적인 편이지만 여행 숙소만큼은 철저히 예약하고 다니는 편이다. 여행 경비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택스 포함 38불이면 내 경험상 호텔에서 하룻밤 잘 수 있는 거의 최저가. 아침 일찍 버밍햄을 출발해 본격적으로 미국 남부 대륙횡단을 시작한다.
때깔좋아 보이는 이 길은 새로 개통한 Future I-22 Corridor. 앨라배마 버밍햄에서 테네시 멤피스를 잇는 213마일의 도로로 2006년에는 일부 구간이 공사중이라 불편했는데 이젠 거의 모든 구간이 오픈한 상태라 기분좋은 아침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거쳐갈 주는 모두 아홉개 주. 그 중 두번째인 미시시피주다.
딥 사우스를 포함한 미국 동부 지역의 고속도로는 어디가 어디랄 것도 없이 비슷비슷한 분위기라 참 단조롭고 평범해 보이는데, 서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조지아로 이사온 어느 지인이, 이 지역은 왜 하이웨이 도로변을 따라 나무를 심어 놓았냐고 하길래 심은게 아니라 원래 있는 숲을 개간해서 만든 도로라고 하자 무척 인상 깊어하더라는. 그런데 그걸 듣는 우리가 더 놀랐다는.
I-22 길 끝에는 테네시 멤피스 (Memphis) 가 있다. 멤피스는 테네시주의 남서쪽 모퉁이에 알칸사주와 미시시피주를 경계로 자리잡은 도시다. 오늘은 700 마일 이상 달려야 하는 날. 멤피스, 넌 다음 번에 접수해주마.
미시시피강을 건너는 철교. 강을 건너면서 알칸사주로 진입한다. 미주리강에 이어 미국에서 두번째로 긴 강인 미시시피강은 문화/산업적으로나 지리/지형학적으로 중요한 미대륙의 젖줄로 미국의 서부에서 동부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하는 강이다. 우리도 대륙횡단을 통해 여러번 미시시피강을 건넜는데 북쪽부터 시작하여 위스컨신의 라크로스, 아이오와주의 데븐포트, 미주리주의 세인트 루이스, 테네시의 멤피스, 미시시피주의 잭슨, 그리고 남단 루이지애나의 배턴루지가 이 강을 건너며 지나갔던 주요 도시들이다. 미국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한 강이라 한번쯤은 제대로 사진을 찍어보고 싶었는데 늘 바쁘게 지나치느라 이렇게 여러번 건너 다녔으면서도 올려놓을만한 사진 한장이 없다.
미시시피강 | Mississippi River
미국의 강 | United States River System
I-40 을 타고 서부를 향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관광 불모지답게 달려도 달려도 주위에는 농경지와 간간이 나오는 크고 작은 도시들 뿐이다. 그래도 알칸사주를 통과하는 길은 간혹 가다 경치좋은 드라이브 코스를 만날 수 있어서 지루한 운전 길에 약간의 위로가 되주었다.
오클라호마주에 들어서니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길의 오른편에서 갑자기 엄청난 수의 새무리가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미국에 살면 간혹 보이는 모습이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대단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알칸사주에서 2년째 연말에 2-3천마리의 찌르레기들이 이유없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뉴스를 읽었는데 아무래도 이놈들이 아닌가 싶다. 놈들이 군무를 추며 시커멓게 하늘을 뒤덮는 모습도 섬뜩한데 떼를 지어 죽어있는 모습은 얼마나 끔찍할까.
'Oklahoma City' 라는 이정표가 나오는 것을 보니 숙소가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하루 종일 달려 장장 700 마일 (약 1200 킬로미터) 을 이동하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400킬로미터 정도 되니 세번을 다녀간 셈이다. 본 것없이 달리기만 해야 하는 오늘같은 날에는 순간 이동 기술이 절실해진다.
오클라호마 시티로 향하는 노을. 여행 중에 만나는 노을은 하늘의 아름다운 선물임에 앞서 날이 저물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다. 마냥 그 빛깔을 감상하기에는 해진 뒤 찾아오는 낯선 곳에서의 어둠이 두려워 마음이 바빠진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길고 지루했던 하루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노을이 반갑기만 하다. 이윽고 도착한 오늘의 숙소. 택스 포함 37불에 얻은 오클라호마 시티의 호텔에서 오늘의 700 마일 여정을 마친다.
Day 3 | 뉴멕시코와의 해후 2008년 11월 23일 Oklahoma City, OK - Santa Fe, NM 540 miles / 870 km |
오클라호마 시티의 아침. 신호 대기 중에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서 둘러보니 왠 새떼가 도시를 점령하고 있었다. 어제 해 질 무렵 보았던 그 새들인가, 잠시 창문을 열었더니 새들이 수다떠는 소리에 귀가 떨어져나갈 지경이라 급히 차창을 닫았다.
전신주에 자리잡은 새들. 이러다가도 한마리가 움직이면 명령이라도 받은 듯 전체가 한꺼번에 날아오르기도 한다. 새들이 무리지어 날며 하늘에서 보여주는 군무는 놀라운 볼거리.
이른 아침이라 안개가 도로 가득 짙게 깔려있다. 앞 차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뿌옇게 덮고 있어 주위 풍경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참 달리는데 수형이 크게 놀란 듯 가슴을 쓸어내린다. 옆을 보니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기둥이 보인다. 윈드밀 (Windmill: 풍력발전을 위한 풍차, 유럽식 예쁜 풍차가 아닌 모던한 하얀색 거대한 구조물에 가까움) 이다. 안개가 시야를 가린데다가 윈드밀 자체가 흰색이라 바로 앞에 나타날 때까지 전혀 보이지 않은 모양이다. 수형이 어지간히 놀란 듯 한동안 멍하니 말없이 운전대만 잡고 있었다.
윈드밀은 미국 대평원 (Great Plains)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공 구조물인데 동부 지역에서는 거의 볼 일이 없어서 볼 때마다 신기한 랜드마크다.
해가 높이 떠오르면서 안개도 걷히고 동시에 주위의 시야도 넓어졌다. 차도 많지 않은 I-40 의 넓은 길을 속도내서 달려본다.
오클라호마를 지나 텍사스에 들어섰다. 냄비의 손잡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팬핸들 (Panhandle) 이라고 불린다는 텍사스 북부지역이다.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달리는데만 800 마일이 훌쩍 넘는 텍사스주지만 오클라호마에서 이 팬핸들 지역을 거쳐 뉴멕시코까지는 고작 180마일 밖에 안된다.
팬핸들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아마릴로 (Amarillo). 주유를 하러 하이웨이에서 잠시 빠져나왔다. 일반적으로 개스값은 대도시 외곽이 제일 싸다. 그나저나 사진 속의 전광판에 보이는 개스값을 보시라, 1.63/갤런. 우리더러 알뜰하게 여행 다녀오라고 그간 폭등했던 개스값이 이렇게까지 하락해주셨다. 앞으로 우리 인생에 다시는 이 가격에 다니진 못할 것 같음.
참고로 2008년부터 이 글을 쓰는 2011년 11월까지의 개스값 추이 그래프를 올린다. 2008년 여름에 기록적으로 폭등했다가 다시 급하락, 바닥을 치는 순간이 바로 우리가 여행을 떠났던 그 시절이라 이 말씀.
장거리 여행 중 도시를 지날 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풍경을 담아보았다. 눈에 익은 로고를 달고 있는 호텔 체인점들, 식당들, 주유소들. 미대륙의 어느 지역을 가던지 도시의 고속도로 주변은 거의 비슷하다. 동부에서 서부, 달리다보면 주위의 자연은 극과 극으로 달라지는데 놀랍게도 도시(외곽)의 고속도로 풍경은 신기하리만치 비슷하다. 나그네 입장에서는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에 좋지만 이렇게 미전역을 독점하는 대기업들의 규모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들에 의해 우리의 일생활이 알게 모르게 지배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두렵기도 하다.
아마릴로에서 벗어나니 눈앞엔 끝도 없이 펼쳐진 평야가 보인다. 우리가 달리는 이곳은 미국의 대평원 (Great Plains), 록키산맥의 동쪽, 미시시피강의 서쪽을 아우르는 너비 약 500마일, 길이 약 2,000 마일에 이르는 초지를 말한다. 평원이라고 해서 농경지로 이루어진 곡창지대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부분이 반사막 기후의 척박한 지역이라 그다지 쓸모있는 땅은 아니다. 호남평야와 비슷할 줄 알았다는.
인적이 드물고 마른 풀들이 뒤덮은 황량한 대평원의 모습. 분명히 내가 2년전에 같은 길을 달리며 보았을 풍경인데 다가오는 느낌은 완전히 새롭고 낯설었다. 같은 길인데 서로 반대방향으로 달릴 때 보이는 모습이 이렇게 다른가. 난 여행루트를 짤 때 같은 길로 왕복하지 않고 조금 돌더라도 다른 길로 가는 편이다. 그래서 내심 이번 여행의 루트가 2006년의 루트와 겹치는 것이 조금 불만이었는데 이제보니 완전히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확신이 든다.
노란 깃발 날리는 이곳은 뉴멕시코.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대평원. 자두에게 읽어주고 있는 전래동화에 나와 있는 대로라면, 그 끝이 어딘지 궁금해서 구경하러 갔던 젊은이들이 백발이 되어 돌아왔다는 전설속의 너른 벌판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내리막길을 타면서 보는 이런 경치는 한번의 시선으로는 차마 다 담아내지도 못하는 넓고도 먼 풍경이다. 이럴 때는 우리 차가 뚜껑 열리는 차였으면 딱 좋겠다.
오랜만에 I-40 에서 벗어나 산타페로 향하는 US84 도로를 탔다. 포장한지 얼마 안되는 새 길인 듯, 새까만 도로와 원색의 차선 덕분에 지면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US84 를 타고 달리니 멀리서만 보이던 산맥들이 좀 더 가까워졌다. 우리가 달리는 이 지역은 지형적으로 록키산맥과 '베이슨앤레인지프러빈스 (Basin and Range Province)' 지대가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아까 대평원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산맥들이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산맥이라고 하면 고봉준령이 늘어서있는 모습이 떠오르지만, 이곳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산맥의 형상이라 그 벌거벗은 모습부터 굴곡없이 밋밋한 능선부위까지 낯설기만 하다. 아마도 이 평평한 산들이 메사 (Mesa) 라고 부르는 지형일 것이다.
드디어 이번 여행의 첫 방문지인 산타페에 들어섰다. 산타페가 뉴멕시코의 주도라는 사실을 지금 막 알았다. 왜 나는 지금까지 앨버커키 (Albuquerque) 라고 생각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