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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여행/2008

제37편. 작정하고 가을 만나기: 코가 기억해내는 가을 여행 (Blue Ridge Parkway, 2008/10)


Oct 2011 | 위스컨신 주로 이사오고 첫 번째 맞는 가을이다. 본격적인 추위가 찾아오려면 아직 한 달이나 더 남았지만, 주위의 숲과 나무들은 어느새 잎을 다 떨구어내었다. 남쪽 조지아는 아직도 태반의 나무들이 채 색을 갈아입지도 않았을 텐데 여긴 벌써 스산한 초겨울이다. 위스컨신에 5년째 살고 있는 후배가 이곳 단풍은 별로 예쁘지 않다는 이상한 말을 했다. 주변에 숲이 이렇게 많은데 왜 가을이 예쁘지 않을까 했더니 단풍의 색이 곱지 않은 게 아니라 잎에 색이 들고 물기를 잃어 낙엽이 되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짧아 단풍을 즐길 여유를 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가을 풍경 하면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색을 보는 재미보다도 각색의 나무들이 서로 어우러져 그려낸 한 폭의 양탄자 같은 그림을 감상하는 운치가 있어야 하는데, 이건 아직 시퍼런 이파리 그대로 달고 있는 놈들부터 말라 비틀어진 잎 몇 개 겨우 남은 초라한 놈들까지, 전성기가 일치하지 않는 흥망성쇠의 불협화음이 울려퍼지는 가을이다. 무채색의 긴긴 시간을 버텨낼 원색의 에너지를 제대로 받지 못한 우리의 겨울이 얼마나 지리하고 우울할지 생각만 해도 어깨가 처진다.




그래서 더 그리운 남쪽의 10월. 가을이 너무 더디게 찾아온다고 불평했던 마음이 후회스럽기만 한 오늘 같은 날에는 울긋불긋한 옛 사진들을 꺼내보는 것이 작은 위안이 된다. 작정하고 떠났던 2008년 우리의 단풍여행, 그 놀라운 선견지명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오늘의 여행을 시작한다.




1박 2일의 짧았던 가을여행의 시작은 노스캐롤라이나 애쉬빌 (Asheville). 아기자기한 이 작은 도시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미국에서 제일 큰 개인소유 저택인 빌트모어 저택 (Biltmore Estate)이다. 반더필드가의 소유인 이 저택은 현재 더 이상 사람이 상주하지 않고 일반인이 투어할 수 있도록 개조해 놓았는데 입장료가 지나치게 비싸고 그에 비해 볼거리가 많은 편은 아니라 실망스럽지만 역시나 관광불모지에 세워진 저택이라 매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백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빌트모어 저택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본격적으로 단풍 여행을 떠나보자.






블루리지 파크웨이
Blue Ridge Parkway
2008년 10월 19일


애쉬빌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북동쪽으로 차를 몰아 우리가 찾은 곳은 블루리지 파크웨이 (Blue Ridge Parkway).




블루리지 파크웨이는 버지니아의 쉐난도어 국립공원 (Shenandoah National Park)과 노스캐롤라이나의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국립공원 (Great Smoky Mountains National Park)을 잇는 장장 469마일 (755킬로미터)의 국도 시스템 (National Parkway)이다. 애팔래치아 산맥의 일부인 블루리지 마운틴을 따라 달리는 이 길은 봄이면 파스텔톤의 꽃길이 되고, 여름이면 신록이 우거진 시원한 숲길, 가을이면 원색의 단풍이 아름다운 미국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하이웨이라면 하루 만에도 달릴 수 있는 거리지만 블루리지 파크웨이는 말 그대로 숲 속을 달리는 도로라서 제한속도도 30마일 정도로 매우 낮고 또 중간에 들를만한 볼거리들도 많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하려면 최소 2박 3일은 걸리는 나름 빡빡한 코스다. 우리는 애쉬빌에서 하이웨이를 타고 블로잉 락 (Blowing Rock)까지 가서 그곳에서부터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방향으로 약 150마일 정도를 달려 내려왔다. 블루리지 파크웨이는 북쪽 입구를 0, 남쪽 입구를 469로 하는 마일포스트 (Mile Post) 표지를 사용하여 도로 내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 블루리지 파크웨이 지도 http://www.nps.gov/blri/planyourvisit/upload/blrimap-2.pdf




블루리지 파크웨이의 프라이스 레이크 (Price Lake).
이른 아침, 물안개 자욱한 호수의 풍경이 어딘가 낯익은 가을의 냄새를 느끼게 한다. 냄새. 냄새는 놀라운 기억창고, 아니 요즘 시대로 따지면 이동식 저장 드라이브 같다. 무슨 말인고 하니, 코에 각인된 어떤 특별한 냄새는 그 냄새를 맡았던 시점의 장소, 그 당시의 상황이나 있었던 일, 그때의 내 기분이나 느낌을 상당히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시각이 불러오는 추억보다 더 정확하고 자세하게 과거를 떠오르게 해준다는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 당시에는 내가 맡고 있는 그 냄새를 크게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대한 내 기억이 후각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 이후로는 추억을 불러오는 어떤 냄새를 맡게 될 즐거운 우연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내가 지내던 곳, 그러니까 조지아를 포함한 미국의 남부에는 독특한 가을의 냄새가 있었다. 숲이 많은 곳이라 나무들이 월동준비를 하며 내뿜는 갈빛 기운이 가득했고 한적한 시골 길을 달리며 쉽게 만날 수 있는 볼 것 없는 앤틱 (Antique) 상점들,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허름한 타운에서 느껴지는 쓸쓸한 냄새가 있었다. 인디애나로 이사가면서 그 분위기를 잊어 버리고 있었는데, 재작년 초가을에 스모키 마운틴을 가는 길에 예민한 나의 후각이 그 가을을 다시 찾아준 적이 있다. 온통 옥수수밭뿐이던 인디애나의 가을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사람과 숲이 만드는 가을의 냄새였다. 똑같은 냄새가 물론 이 블루리지 파크웨이에도 가득했을 것이다.




수형 작. 수형은 클로즈업해서 찍는 것을 좋아하고 나는 전체를 담는 것을 좋아한다. 예전에도 한 번 얘기한 적 있지만 우린 참 닮은 점이 없는 부부다.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지금까지 10년간 '비교적' 조용하게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미스테리일 따름.




빨주노초 무지개빛으로 물들어버린 숲.




어쩌다 보니 제대로 된 단풍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죽하면 '작정하고 떠난 여행'이라고 했을까. 사계절 내내 따뜻한 플로리다를 제외하고 단풍이 드는 최남단인 조지아주에 살다 보니 11월이나 되어야 단풍 구경을 할 수 있는데 그즈음이면 이미 블루리지 파크웨이나 스모키 마운틴 같은 곳은 절정이 지나고 서서히 나무들이 잎을 잃어버리는 철이 된다. '우리 동네 단풍 들었네'하면 미국의 90% 지역에서는 이미 초겨울 태세.




이곳은 블루리지 파크웨이에서 제일 유명한 포인트 중의 하나인 린 코브 (Linn Cove Viaduct). 산을 깎아서 도로를 내는 대신 에둘러 돌아가는 378미터의 다리를 만들어 이 길이 지나는 할아버지산 (Grandfather Mountain)이 훼손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린 코브는 산허리를 감싸며 돌아가는 독특한 구조의 교량이다.




린 코브를 타고 달리는 길. 이 사진을 찍기 위해 네 번을 왔다갔다 하는 동안 묵묵히 운전대를 잡아준 수형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달리는 차 안에서 창문 열어놓고 사진 찍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여.




커브를 돌기 직전의 아찔한 순간. 굽이굽이 펼쳐진 블루리지 마운틴이 인상적이다. 블루리지는 푸른 능선이라는 뜻이다. 어울리는 이름이다.




멀리서 바라본 린 코브와 블루리지 마운틴.




푸른 능선. 새벽에 올라 이 푸른 능선과 마주하면 얼마나 감동적일까 생각해보았다.




낙엽 밟기. 낙엽 가득한 짧은 등산로를 따라 숲 속을 거닐어 보았다. 사춘기 때 난 낙엽 밟는 소리를 참 좋아했다. 가을이면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친구와 함께 손을 잡고 바싹 마른 갈색 잎을 바사삭 소리가 나게 밟으며 걸었던 기억이 난다.




타오르는 횃불처럼 붉게 물든 나뭇잎.




웬일로 수형이 내 사진도 찍어 주었다.
아주 이다음에 사진으로만 우리 가족의 인생을 돌아본다면 나는 우리 가족에게 거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다름없이 보일 것이다. 내 사진이 너무 없어서 슬플까.




나뭇잎 배와 그림자.




그린납 전망대 (Green Knob Overlook).




브로콜리 아니면 컬리플라워 같이 생긴 숲. 컬리플라워가 아니라 컬러플라워라고 불러야 할 듯.




능선 위의 휴식.
지금까지 우리의 여행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쁘게 돌아가는 회전초밥집. 컨베이어 벨트 속도에 맞춰 끊임없이 내렸다 올라탔다를 반복하는 주입식 여행. 당장 뭘 먹는지도 모르게 꾸역꾸역 넘기고 소화는 나중에 시키는 황소의 식습관 같은 여행이랄까. 구매하지는 못하고 바라만 봐야 하는 윈도우 쇼핑같은 여행이기도 하고, 다녀오면 그때부터 쉬어야 하는 극기훈련식 강행군이기도 하고, 다시 찾을 것을 전제로 한 답사여행 같기도 하다. 놀 줄 모르는 답답이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하지만 언젠가는 맛있게 먹고, 소화까지 완벽하게 마치고 돌아오는 여행을 하게 될 날도 찾아오리라.




생각이 많은 아이. 돌아보면 다섯 살의 자두는 마냥 귀엽고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한 딸, 우리가 그저 예뻐하기만 했던 딸이었던 것 같다. 여덟 살의 자두야, 미안. 사랑이 변한 건 아니라는 거 알지?




지금 우리가 지내는 메디슨의 학교 아파트는 유난히 잔디밭이 넓다. 우리 동과 옆 동 사이의 커다란 잔디밭에 키가 큰 활엽수가 두어 그루 있는데 유난히 잎이 일찍 떨어져 온통 그 넓은 잔디밭을 노랗게 물들였다. 한동안 동네 아이들이 낙엽을 긁어다가 뿌리며 놀기도 하고, 그 위를 뒹굴기도 하면서 가을 놀이에 푹 빠졌었다.




봄부터 늦가을까지 아파트 관리소에서 주기적으로 잔디를 깎아주는데, 얼마 전에는 창밖을 보며 깜짝 놀랐다. 잔디 깎는 기계를 운전하는 아저씨가 일부러 낙엽 위로 달리며 아예 낙엽을 다 갈아버리고 있는 것이었다. 가루가 된 낙엽이 도로 잔디밭 위로 뿌려지면서 그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이 많은 낙엽을 다 어떻게 치울까 싶었는데 이렇게 무자비하게 가루로 만들어 날려버릴 줄은 몰랐다. 다시 초록빛을 되찾은 잔디밭을 보고 있으니 왠지 마지막 남은 우리의 가을을 뺏긴 기분이 드는 게 좀 서운했다.




마운트 미쳴 (Mount Mitchell)은 미시시피 강 동쪽 지역에서 제일 고도가 높은 곳. 다시 말하면 미 동부에서 제일 고도가 높은 곳이다.




그래 봐야 2,000미터. 그래도 벌써 식생이 달라진다. 침엽수의 짙은 녹색 때문에 화려한 활엽수림과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데빌스 코트하우스 (Devil's Courthouse) 주차장에서 본 풍경. 색의 톤이 일정하니 울긋불긋한 것보다 내 눈에는 훨씬 고상해 보인다.




컬리플라워처럼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던 아까의 숲과는 달리, 이곳은 마치 불이 났다가 복원된 곳처럼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다. 단풍의 주황색과 고사목의 잿빛이 잘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늦은 오후의 지는 해가 단풍 빛을 바래기 시작할 무렵 블루리지 파크웨이에서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가을의 노스캐롤라이나를 봤으니, 철쭉 피는 봄에 버지니아 블루리지를 꼭 한번 타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이루지 못한 소망으로 끝날 것 같다. 이렇게 우리의 2008년 1박 2일 단풍여행이 끝났다.






쉐난도어 국립공원
Shenandoah National Park
2006년 10월 23일


남쪽의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국립공원에서 시작한 블루리지 파크웨이는 북쪽의 쉐난도어 국립공원의 스카이 드라이브 (Sky Drive)로 이어진다.




2006년 뉴욕에 가족 행사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쉐난도어 국립공원을 들러 스카이 드라이브를 타고 내려왔다.




10월 말이라 절정이 지나고, 스산한 초겨울 분위기에 바람도 많이 불어 차에서 몇 번 내리지도 못했다.




절정의 파티를 마치고 시들어가는 가을 산. 스카이 드라이브에서 바라보는 풍경.




노스캐롤라이나의 단풍과는 색감이 약간 다른데 아무래도 고도가 조금 더 낮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멀리 보이는 애팔래치아 산맥.




절정이 지난 10월 말에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단풍들이 제 빛을 최고로 발할 때 온다면 얼마나 멋질까. 과연 미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단풍길이라고 불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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