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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여행/2008

제35편. 2008 Labor Day 여행 제2부: 잭과 콩나무,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수식어 (Sequoia/Kings Canyon National Park, 2008/09)


Oct 2010 | 샌프란시스코를 벗어나 풍요의 땅 센트럴 밸리 (Central Valley)를 달린다. 전체 농지의 1퍼센트에 불과한 이 땅에서 미국 전체 농작물 수확량의 8퍼센트 이상이 생산된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농업지대라 그런지 달리면서 보이는 것이 온통 밭과 과수원이다. (위의 사진은 센트럴 밸리가 아닌 시에라 네바다 산맥)




I-5를 타고 한참동안 너른 평야를 남쪽으로 내달리다 비살리아 (Visalia)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도시를 갓 벗어났을까, 난 갑자기 눈을 비비며 수형에게 물었다. "저게 산이야, 구름이야?"
난 어려서부터 언제나 산이 있는 풍경을 좋아했다. 지금도 기억난다. 어느 날 아침 학교를 걸어가는데 우리 동네 골목길에서 두 건물 사이에 걸쳐진 짙은 색 구름이 마치 산의 실루엣처럼 보인 적이 있었다.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때이기도 했지만 그 때 그 광경을 보는 내내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지금 이렇게 눈앞에 시에라 산맥이 어스름하게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그 윤곽이 너무 희미하여 아직도 이것이 정말 산인지, 아니면 구름의 장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진위에 상관없이 내 가슴은 예전처럼 뛰고 있었다.




키 작은 관목들만이 듬성듬성 벌거벗은 산을 메우고 있다. 얼핏 보면 점묘법을 쓴 수묵화와도 같은 이 풍경은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의 동부 지역에서는 본 적 없는 반사막지대의 독특한 식생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지금 우리가 향하는 곳은 울창한 삼림 가득한 세코이아 국립공원 (Sequoia National Park). 짙은 향 뿜어내는 나무 숲 사이를 구불거리는 산악도로를 타고 멀미나게 달린다. 렌트카이긴 하지만 내 인생 처음으로 타보는 지붕에 창이 달린 차.




세코이아 국립공원은 캘리포니아 시에라 네바다 산맥 (Sierra Nevada)의 일부로 미대륙에서 제일 고도가 높은 마운트 휘트니 (Mount Whitney) 가 바로 이 공원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세코이아 국립공원 남쪽 입구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킹스캐년 국립공원으로 들어갔다가 마지막에 요세미티 국립공원 (Yosemite National Park)으로 향하는 것이 우리의 일정.

세코이아/킹스캐년 국립공원 지도 | Sequoia/Kings Canyon National Park




오토 로그 (Auto Log). 나무가 어찌나 큰지 쓰러진 세코이아 나무 위로 자동차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다고 해서 오토 로그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지금은 나무가 자동차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어 폐쇄했지만, 예전에는 유명한 포토 포인트였다고.




쓰러진 거인 위로 올라간 꼬마. 사실 이렇게 큰 나무가 땅에 뿌리를 박고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자연의 신비다. 가지 끝에 피워 내는 청록의 이파리들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먹고 자란다고 치더라도 뿌리에서 80미터가 넘는 높이까지 어떻게 물을 운반해가는지 생물을 전공했으면서도 신기하기만 하다. 어쩔 수 없이 아이의 상상력으로 나무 안에 살고있는 난장이들이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물을 운반한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옆에서 본 오토 로그. 저 위로 자동차가 올라갈 수 있을 정도였다니 그 너비와 크기가 짐작이 간다.




이번에는 터널 로그다. 도로 위로 쓰러진 통나무를 뚫어서 그 밑을 자동차가 지나가도록 만들었다.




이 터널 로그를 통과하는 차가 우리 차 시빅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늘 같이 다녀서 그런지, 특히 횡단여행을 마치고 나면 더욱더 우리 차가 한 식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는 우리가 드물게 비행기를 타고 간 여행이어서 시빅이를 못 데리고 간 게 너무 아쉬웠다. (걔가 너희를 데리고 가는 게 아니구?)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거대한 나무 장군님을 알현하러 가는 길이다. 업혀가는 공주님의 행차.




세코이아 국립공원의 가장 큰 볼거리는 하늘을 뚫을 듯이 높게 뻗어있는 커다란 세코이아 나무들이다.




밑둥에서 꼭대기까지 한 그루의 나무 전체를 한 장의 사진에 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거대한 나무들이 숲에 한 가득이다.




나무들의 높이는 80미터에 육박하고 그 너비만도 5~6미터가 훌쩍 넘는다고 하니 얼마나 오래된 숲일지 가늠이 된다. 실제로 나무들의 나이는 이천 살이 넘는다고 한다.




트레일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 (사진의 왼쪽 아래부분)이 꼬마처럼 작아 보여 마치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눈앞에 나타난 셔먼 장군님.




세계에서 제일 큰 나무, 셔먼 장군 나무 (General Sherman Tree). 과연 장군님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위엄 가득한 나무였다. 영국에 있었으면 기사의 작위를 부여받았을까? 우리나라에 있었으면 정2품을 하사 받았을 테지. 나무가 너무 높아서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높이 83미터, 둘레길이 31미터, 지름 11미터의 이 셔먼 장군님은 연세가 무려 2,500살이시란다. 2,500년이라는 긴 시간을 한자리에 서서 지키는 일, 성격 급한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무 아래 팔을 벌리고 있는 것이 자두와 나. 눈짐작으로 보아도 내 키의 열 배를 훌쩍 넘는 높은 나무들이다. 이들은 애초에 서로 땅과 물, 영양분을 놓고 다투는 경쟁자였을 테지만 2,500년이라는 세월이라면 원수도 정들어 친구 될 법하다. 그나저나 한참을 기다려도 저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 하얀 윗도리 아줌마가 원망스럽다. 아주머니, 우리 딸 팔 떨어지것소, 사진 찍게 잠깐만 좀 비켜주소.




이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져진 나무는 마치 단단한 무기질로 변해버린 것 같다. 사진만 보아서는 천연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보인다.




모로락 (Moro Rock) 정상으로 가는 길. 모로락은 세코이아 국립공원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화강암 바위다. 철 난간이 설치된 400개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바위 정상까지 갈 수 있다.




모로락 주위의 고사목.




정상까지 가는 길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하지만 경고문이 붙은 것에 비해 올라가는 길이 험하거나 위험하지는 않았다. 자두 또래 꼬마들도 거뜬히 정상까지 고고씽.




모로락 정상. 폭이 5미터도 되지 않는 정상의 양쪽으로 낭떠러지가 있는 위험천만한 장소인데 난간이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긴장감이 덜했다.




정상에서 보이는 세코이아 국립공원의 고봉준령들. 저래 뵈도 높이가 4,000미터에 달하는 고산들이다. 미대륙에서 해발고도가 제일 높은 마운트 휘트니 (Mt. Whitney, 4,418미터) 가 바로 이 세코이아 국립공원 내에 있으니 이곳이 얼마나 높은 지대인 줄 알 수 있겠다. 한국에서는 천 미터만 넘어도 높은 산이라고 했는데, 미국에서는 이천 미터 이상도 차로 올라가다 보니 삼천 미터가 넘는 산들도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체감하는 산의 높이는 다리가 수고하는 정도와 비례하는 것 같다. 정상까지 오르는 데 힘이 들수록 더 높은 산처럼 느껴진다는.



 


울창한 산림이 있는 국립공원이라면 어김없이 적혀있는 경고 문구. 공원 내 숙소 근처에 세워진 경고문. 곰의 힘이 얼마나 센지 웬만한 자동차 문은 그대로 부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음식에 길이 들여진 곰들이 캠프장 주변이나 캐빈 근처로 와서 사람들이 가져온 음식을 찾아다니는데, 그래서 어느 국립공원에 가든지 야생동물에게는 먹이를 주지 말라는 경고를 쉽게 볼 수 있다. 텐트 캐빈 같은 시설에는 곰이 쉽게 열 수 없는 철제 캐비넷이 함께 설치되어 있어서 그 안에 모든 음식물을 넣어놓게 되어있다. 재밌는 것은 화장품이나 치약 같은 화장실 용품 (Toiletries) 들도 반드시 캐비넷에 넣어놔야 한다는 것. 화장품의 달콤한 향을 맡은 곰들이 맛있는 간식거리로 착각한다나.




오늘 우리의 숙소.




이제 여기는 킹스캐년 국립공원 (Kings Canyon National Park). 캠핑의 천국이라는 킹스캐년 국립공원은 차로 들어갈 수 있는 구간이 한정되어 있고 대부분 캠핑이나 하이킹을 할 수 있는 트레일이 많은 곳이라 우리는 킹스캐년 시닉 바이웨이 (Kings Canyon Scenic Byway) 를 타고 차로 갈 수 있는 도로의 끝까지만 달려갔다 돌아왔다. 우리는 아직 한 번도 캠핑을 해본 적이 없다. 해본 적이 없는 것을 도전하는 데 있어 무척이나 소심한 우리. 미국을 떠나기 전 꼭 한번은 캠핑을 즐기고 싶다. 단, 곰이 나올 걱정이 없는 곳에서.




의외로 동양적이 분위기가 풍기는 산세다. 길을 따라 달리는 쬐그만 자동차를 보면 이 절벽이 얼마나 높은 절벽인지 알 수 있다.
예전에는 풍경 사진을 찍을 때 되도록 사람을 넣지 않고 찍으려고 했다. 뭐 사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사람은 꽤나 훌륭한 지도의 축척 표시 같은 존재라는 걸 알게 됐다. 특히 스케일이 큰 자연경관을 담을 때는 사진만으로는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워 실제의 감동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우연히 실수로 사람이 찍힌 몇 장의 사진을 보면서 되려 배경의 느낌이 확 살아버리는 걸 보고 파일을 지우려다 멈칫한 적이 있다.




왕의 계곡으로 들어가는 초입. 눈앞에 나타난 킹스캐년의 아침 속에서 정말 오랜만에 동양적인 경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은 해가 중천으로 오르기 전, 첩첩산중 골짜기에는 안개 자욱하게 피어있고, 모든 것을 잠재우는 차가운 기운만이 깊은 산에 가득한데, 하늘을 메우는 구름이 만들어 낸 짙은 그림자가 깊고도 거대한 계곡의 웅장함과 어우러져 정말 잊지 못할 풍광을 연출해냈다.




여행의 모든 순간은 폴라로이드 사진과 같다. 되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재생시킬 수 없는 시간들. 그것이 잊지 못할 감동의 순간이라면 마음은 더욱 아쉬워진다. 똑같이 복사해낼 수 없는 단 한 장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감동의 순간들이 소중하다. 더구나 그것이 뜻밖의 선물이라면 시간을 멈추고 영원히 그 순간을 즐기고 싶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같은 장소에 들렀지만 아까의 감동은 이미 안개와 함께 햇빛에 날아가 버린 후였다. 하지만 안개가 걷히면서 드러난 깊고 어두운 계곡의 모습을 보면서 왜 이곳이 왕의 협곡이라 이름 지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한 폭의 수묵화 같았던 계곡을 뒤로하고 요세미티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