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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여행/2007

제28편. 록키산맥을 따라가는 국립공원 순례기: 단돈 12불로 분에 넘치게 호사스러웠던 (Grand Teton National Park, 2007/08)


Jun 2011 | 여행. 여행 속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이라는 그림. 이 수 많은 그림들을 기술하고 묘사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몇 개나 될까. 가끔씩 다른 사람들의 여행 블로그에 들어가 보면 자신의 눈에 비친 풍경과 경치를 묘사해놓은 화려하고 적절한 미사여구에 감탄하며 스스로 부끄러워지곤 한다. 미국에 9년째 살면서 영어는 늘지 않는데 한국어는 잊어버리는 딜레마를 안고 사는 우리. 게다가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문학서적 보기를 돌같이 하며 살고 있다. 로설과 무협지는 다운까지 받아서 읽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한정된 어휘만을 가지고 여행기랍시고 쓸라니 아주 죽을 맛이다.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아무리 바라보고 있어도 떠오르는 단어들은 초딩 수준의 단순 어휘들뿐. 그마저도 몇 개 없어서 여기저기 돌려가며 쓰다보면 화딱지가 날 때도 있다. 특별한 곳을 특별하게 기록하고 싶은데 그게 맘대로 안되니 답답하기만 하다. 멋있다, 멋있다 X3, 멋있다 X4, 멋있다 X5. 이렇게 쓰면 차이가 좀 날까?




이쯤해서 이번 '록키산맥을 따라가는 국립공원 순례기' 의 중간점검 들어간다. 초딩 수준으로 표현한 여행지별 간단/압축 느낌이다.

글래시어 국립공원은 사람을 압도하는 곳,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신비하고도 신기한 곳,
그랜드티턴 국립공원은 아름답고 즐거운 곳,
그리고 록키마운틴 국립공원은 제일 마음에 드는 곳.

아, 이보다 더 함축적으로 네 곳의 느낌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매사에 시니컬한 수형의 지적질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리하여 여행기 제28편, 록키 순례기 세 번째 장소는 아름답고 즐거운 곳으로 기억되는 그랜드티턴 국립공원 (Grand Teton National Park)이다.




그랜드티턴 국립공원은 옐로스톤 남쪽 입구에서 15분쯤 달리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록키산맥의 한줄기인데 그랜드티턴에서는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비해 좀 더 순수하고도 전형적인 록키산맥의 형세를 볼 수 있었다. 게다가 하늘에서부터 흘러내린 산자락은 기슭을 채 만들기도 전에 물에 먼저 발을 담가 마치 산맥 전체가 커다란 호수에 풍덩 빠져버린 느낌이 들었다. 이번 여행 중에는 참 많은 호수를 보았는데 지금까지 본 거의 모든 호수가 빙하 (Glacier)에 의해 만들어진 호수라고 한다. 호수는 고여있는 물이라 깨끗하지 않을 거라는 선입견과 달리 만나는 호수마다 어찌나 물이 맑고 색이 고운지 별천지에 온 기분이 들었다.
사진은 해지고 난 뒤의 잭슨 레이크 (Jackson Lake)와 티턴 산맥 (Teton Range).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 지도 | Grand Canyon National Park Map




그랜드티턴 국립공원에서는 잭슨 레이크 북쪽의 콜터 베이 빌리지 (Colter Bay Village)에 묵었다. 콜터 베이 빌리지의 캐빈들.




캐빈 내부. 글래시어 국립공원의 캐빈에 비하면 별 네 개짜리 호텔같다. 침대를 구석구석 순례하며 자는 자두의 잠버릇 때문에 침대 두 개를 붙여놓고 자야 하는데 이게 또 보통 일이 아니다. 그냥 포기하고 두 침대 사이에 아이스박스를 놓고 잔다. 수시로 깨서 자두의 위치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집에서나 밖에서나 나는 선잠을 잔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자두 잠자리 독립을 위한 나의 투쟁은 끝나지 않는 백년 전쟁이다. 다 큰 어린이 (Big Girl) 는 밤에 혼자 자는 거라고 제 방도 꾸며주고 침대도 놓아줬지만, 새벽이면 어김없이 건너와서 나를 조용히 부르고는 내 옆에 누워 잠을 청한다. 옛날에 친정엄마 말씀이 부부 사이 갈라놓는다며 애는 가운데 재우는 거 아니라고 하셨지만, 퀸사이즈 침대 두 인간 난로 사이에 껴서 자는 내 고충은 누가 알아줄까. 차렷 자세로 꼼짝도 못 하고 있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삭신이 쑤셔서 하루종일 찌뿌둥하다. 어르고 달래고 윽박지른 것도 이미 수백 번, 하지만 받아치는 기술도 다양하다. 어떨 땐 여기가 아프고, 어떨 땐 옷장에 숨어있는 도깨비가 무섭다 하고 최근에는 외계인이 납치할까 봐 두렵다고까지. 마지못해 혼자 자러 들어가도 한 시간, 두 시간, 한숨 푹푹 쉬며 잠을 도통 못 이루니 결국에는 내가 포기할 수밖에.
"그래, 내가 천년만년 너를 끌어안고 있겠냐, 니가 천년만년 엄마 좋다고 같이 자고 싶다고 하겠냐, 길어봐야 틴에이져 될 때 까지일 텐데, 니 스스로 니 방 찾아 들어가 문 닫을 때까지 내 한번 기다려보마."*

*2014년 업데이트 | 2014년 5월 현재, 자두는 아직도 우리와 같은 방에서 잠.




잭슨 레이크 호텔 (Jackson Lake Lodge) 2층 발코니에서 본 티턴의 산줄기. 습지와 호수, 그리고 티턴과 하늘이 멋지게 어우러져 있었다. 이곳에서 보는 티턴의 모습이 워낙 빼어나기 때문에 이 호텔에 머물지 않는 사람들도 일부러 찾아와 티턴을 감상하고 간다고 한다. 이 여행기의 첫 사진이 이곳에서 찍은 것이다.




커다란 호텔 창문 밖으로 펼쳐진 티턴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랜드티턴 국립공원은 티턴 레인지 (Teton Range), 잭슨 레이크 (Jackson Lake) / 제니 레이크 (Jenny Lake), 티턴 공원도로 (Teton Park Road), 스네이크 리버 (Snake River) 그리고 US191 도로가 모두 남북으로 나란히 배열된 모습을 하고 있다. 호수를 사이에 두고 티턴의 맞은 쪽으로는 목초지가 펼쳐져 있는데 이곳을 달리는 두 도로를 오가며 주요 뷰포인트들을 쉽게 감상할 수 있었다.




어느 국립공원에서나 야생동물은 공원 내에서 가장 중요한 보호 대상 중에 하나다. 공원 내에서는 대체로 제한속도가 25마일 정도인데 이를 지키지 않고 달리는 차들에 치여 죽은 동물의 수가 엄청나다고 한다. 이 글을 쓰기 얼마 전 콜로라도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길가에 차에 치여 죽은 사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더 끔찍한 것은 어떤 사슴들은 몸통만 남아있었다는 점이다. 박제를 하려고 나머지 부분을 가져갔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잔인한 생각이 들었다.




수형은 동물 관련 표지판에 관심이 많다. 내가 워낙 아무 데나 카메라를 들이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길 가다 생전 사진 한번 찍어 보라는 소리를 안 하는데 유독 동물이 그려진 표지판에는 욕심을 낸다. 달리다가 갑자기 어, 저거 좀 찍어봐바 하는데 이건 뭐 내가 소머즈도 아니고. 속도나 줄이면서 말을 하던지. 그래도 시키는 대로 다 하는 나. (소머즈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보는 당신은 나와 한 시대를 사신 분)




US191 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멀리 티턴을 배경으로 목장들이 나타난다. 목장의 오래된 헛간들은 사진가들이 즐겨 찾는 포토 포인트라고 한다.




스네이크 리버 (Snake River) 포인트에서 본 티턴 레인지. 눈앞에 바로 보이는 제일 높은 봉우리가 4,197미터에 달하는 그랜드 티턴 봉우리다. 그랜드 티턴이라는 공원 이름이 바로 이 봉우리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 공원 내 거의 모든 뷰포인트에서 그랜드 티턴 봉우리가 보인다. 스네이크 리버에서는 래프팅을 즐기는 사람들의 무리가 보였다. 물을 무서워하고 수영도 못해서 한 번도 래프팅을 해본 적은 없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애들 엄마가 되기 전에 꼭 이런 스포츠들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US191번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다 무스 정션 (Moose Junction)에서 티턴 공원도로 (Teton Park Road)를 타고 다시 북진이다. 티턴이 조금 더 가까와졌다.




티턴 레인지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이는 것 같은 나무로 뒤덮인 산이 아니라 단단한 바위가 그대로 드러난 바위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얼핏 보기엔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 저 산들이 해발고도 4,000미터에 육박하는 아주 고산들이라, 꼭 바위 때문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식물이 자생하기에 어려운 조건이기 때문이다. 8월 초, 여름에도 녹지 않는 빙하 덩어리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는 것만 봐도 저 산맥의 환경이 얼마나 척박한지 알 수 있다.




제니 레이크 (Jenny Lake). 그랜드 티턴의 대표적인 두 호수가 제니 레이크와 잭슨 레이크다. 지금 보니 둘 다 사람 이름인데 이름답게 제니 레이크는 잭슨 레이크에 비해 훨씬 크기도 작고 여성스럽다.




제니 레이크에는 호수를 건너 티턴의 바로 밑자락까지 운행하는 셔틀보트 (Shuttle Boat)가 운행한다. 티턴 레인지의 인스퍼레이션 포인트 (Inspiration Point)까지 가려면 이 셔틀보트를 타야 한다. 몇 시간씩 걸려서 제대로 하이킹을 계획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셔틀보트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 것이 티턴에 직접 발을 디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멀리서 바라만 보던 티턴의 산자락에 올랐다. 인스퍼레이션 포인트까지는 등산로를 따라 30분에서 1시간 정도 산행을 해야 올라갈 수 있다. 생각보다는 경사가 심해서 자두가 조금 힘들어했지만 그래도 할만한 거리였다. 옐로스톤의 인스퍼레이션 포인트에서 받은 충격과 감동을 기대하고 올랐는데 그 정도에 미치진 못했지만 땀을 식히며 바라보는 호수와 초원의 경치가 나쁘지 않았다. 왕복 1~2마일 정도의 등산길은 미국 사람들도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많이들 올라온다. 업고, 안고, 걸리고. 어린아이가 셋인 집들도 하나는 업고, 둘은 걸리면서 데리고들 다니는데 참 힘들겠다 싶으면서도 내 걱정이 무색하게 씩씩하고 밝아 보이는 젊은 부모들의 표정을 보면 참 보기 좋고 많은 걸 배우게 된다. 우리도 애들 데리고 국립공원 열심히 다니지만, 꼬맹이들 셋씩 데리고 국립공원 찾아다니며 하이킹하는 미국인들 보면 고개가 절로 숙어진다.




셔틀보트를 타고 제니 레이크를 다시 건너 선착장에 도착하니 주변에 카누를 타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수형과 나 둘 다 수영도 못하고 이런 세련된 야외 스포츠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 어딜 가면 유람선은 타봤어도 카누같이 직접 노를 젓는 배를 타본 적은 없었다. 근데 우연히 선착장에 붙은 가격표를 보니 카누 빌리는데 한 시간에 12불이란다. 어, 이 정도는 우리가 투자할 수 있는데 말이지.




카우보이모자 쓰고 구명조끼 입은 자두, 제법 폼이 난다.




노 저어 호수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에 빠질까 무서워 호수 한복판으로는 감히 나가지도 못하고 가장자리만 맴도는 강태공들이었지만 처음으로 해보는 노젓기가 무척 재밌었다. 자두가 노를 놓칠까 전전긍긍했는데 작은 손으로 꼬옥 붙잡고 끝까지 놓지 않는 게 어찌나 기특하던지. 생각만큼 배를 조종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호수에 둥실 떠있는 작은 배에 앉아있는 기분이 짜릿하면서도 겁나고, 불안하면서도 좋았다.




수형과 나는 참 촌스런 사람들이다. 세련되고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게 영 체질에 맞지 않는 시골쥐 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좋은 것들이 당연히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사는 편이다. 우스운 말이지만 이렇게 카누 한번 타는 것도 내 것 아닌 세상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어렵게 용기 내서 도전한 일이었다. 근데 생각보다 너무 즐겁고 좋았다. 막상 해보니 대단히 큰돈이 드는 일도, 대단히 큰 기술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우리 같은 사람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욕심 없이 사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레벨을 너무 낮추고 주눅 들어 사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여튼 12불짜리의 이 액티비티가 그랜드 티턴을 잊을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주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보았던 수많은 명승지 중에서도 기억에 더 오래, 확실히 남는 곳은 경치가 훌륭한 곳보다도 나와 어떤 식으로든지 개인적인 교감이나 사건, 얽히는 일이 있었던 곳인 것 같다. 느낌이야 덜 하겠지만 경치는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수많은 사진들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여행지가 자신에게 의미 있는 곳이 된다는 것은 경치 자체보다도 내가 그곳에 얼마나 녹아 들어갔는가에 따른 것이지 싶다.




선착장으로 돌아가는 길. 물이 어찌나 맑은지 햇빛에 반짝이는 물속의 자갈들이 금화처럼 보인다. 금화가 가득한 호수라. 우리가 오늘 엄청난 곳을 노 저어 다녔네.




많은 사람이 옐로스톤보다 그랜드 티턴이 더 좋았다고 하는 이유를 알겠다. 높고 험한 바위산과 넓고 잔잔한 호수가 만나 이루는 완벽한 조화. 옐로스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다음은 순례의 마지막, 록키마운틴 국립공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