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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여행/2006

제23편. 징글징글하게도 어긋나기만 했던 7박 8일 플로리다 일주 (Trouble Travel Florida, 2006/12)


Jan 2009 | 말 그대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플로리다 일주여행. 태평양 바닷물 먹고 집으로 달려온 관성으로 키웨스트까지 굴러간 2006년 여행의 결정판. 탄력받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다. 
2006년 7월부터 12월까지 6개월간 주행거리 만여 마일. 서쪽으로는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에서, 동쪽으로 뉴욕과 워싱턴 디씨까지, 북쪽으로는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국립공원에서 남쪽으로 플로리다 키웨스트까지.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미국 온 지 4년 만에 여행에 재미 붙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집에만 있었수.




집에서 출발하여 세인트 오거스틴 (Saint Augustine) - 포트 로더데일 (Fort Lauderdale) - 키웨스트 (Key West) - 에버글래이즈 국립공원 (Everglades National Park) - 마이애미 (Miami) - 탐파 (Tampa) - 세인트 피터스버그 (Saint Petersburg) 를 거쳐 돌아온 7박 8일의 2,000마일 여행. 그 사건의 현장으로 출발!



Day 1 | 불안한 출발
Athens, GA - Jacksonville, FL


플로리다 잭슨빌 (Jacksonville)까지 가는 370마일의 일정. 현관문 잠갔고, 불 다 껐고, 현금과 신용카드, 새로 산 카메라 챙겼고, 준비물 리스트 대충 훑어봐도 빠진 것 없이 다 잘 챙겼는데 도대체 기분 나쁜 이 찜찜함은 뭘까. 
US441을 타고 남쪽으로 한 시간쯤 달렸을까, 엄마야 여보, 밥통! (사건 1) 
장거리 여행을 다닐 때마다 꼭 챙겨 가지고 다니는 3인분짜리 전기밥솥을 두고 왔다. 정성스레 지어놓은 저녁밥 3인분까지. 7박 8일 묵은 밥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집에 돌아와 밥통 뚜껑을 열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진다.
그나저나 12월에 웬 장마? US441을 탈 때까지만 해도 괜찮더니 메이컨 (Macon)에서 I-75 을 타면서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300 마일을 가는 내내 그치질 않는다 (사건 2). 특히나 I-75 도로 상에는 공사구간도 많아 혹시 빗길에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바짝 긴장한 탓에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뻗어 버렸다. 세인트 오거스틴 (St. Augustine) 일정을 취소하고,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산 밥통에 밥 해먹고 일찍 잤다.



Day 2 | 시험에 들다
Jacksonville - Fort Lauderdale


세인트 오거스틴 (St. Augustine). 1565년 스페인에 의해 세워진 미국에서 제일 오래된 식민도시라는데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된 역사 도시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무색하게 도시 진입로에는 여행객들을 유혹하는 싸구려 관광시설들이 즐비했다. 미안하지만, 역사가 상품이 되어 팔려 나가는 도시라는 부정적인 첫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여기는 세인트 오거스틴의 카스티요 드 샌 마코스 국립기념물 (Castillo de San Marcos National Monument). 미국에서 제일 오래된 석조 요새다.




야자수를 배경으로 한 바닷가 요새는 참 이국적이다. 이 '카스티요 드 샌 마코스' 요새는 1600년대 말에 스페인에 의해 세워졌지만 이후 그 주인이 여러 번 바뀌면서 그때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다가 마지막으로 1942년에 원래 이름인 '카스티요 드 샌 마코스' 로 재명명 되었다고 한다.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싸움이 잦은 격전지였다는 뜻일 터. 내가 딛는 발걸음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가 스며들었을지. 지금은 여자와 아이들까지도 자유롭게 드나드는 이름뿐인 요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요새의 옛 주인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내부. 아래에선 군 제복을 입은 파크 레인져 (Park Ranger)가 이끄는 투어 중이다. 흐린 날의 촉촉한 공기를 머금어 잔디와 성벽의 색이 더 또렷하다.




오늘 개시한 새 카메라 시험 중. 동생이 결혼 선물로 사준 '니콘 쿨픽스 995'를 5년 만에 졸업하고, 139불짜리 '후지 파인 픽스 V10 (Fujifilm FinePix V10)' 을 샀다. 아직 화질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부팅 시간이 짧은 것은 완전히 마음에 든다. 스위치를 켜자마자 셔터를 누를 수 있어서 순간 포착에 그만일 듯. 더구나 소리도 안 나는 40초짜리 동영상 대신 음성과 화상이 둘 다 지원되는 15분짜리 동영상을 찍을 수 있다니 감개무량이다. 무엇보다 액정이 커서 사진이 흔들렸는지 그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까지. 우리 같은 비전문가 똑딱이 유저에겐 가격대비 최고의 아이템이다.




세인트 오거스틴 시내를 잠시 걸었다. 사진은 '장로 기념 교회 (Memorial Presbyterian Church)'라는 유명한 건축물이다. 세인트 오거스틴은 스페인에 의해 세워진 도시라 스페인의 건축양식을 따른 건물들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우리가 역사도시에 관심이 없어서 그간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이곳 세인트 오거스틴은 조지아주의 사바나 (Savannah)와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찰스턴 (Charleston)과 더불어 미국에서 제일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사실 세 도시 모두 오래된 역사 도시답게 유서 깊은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데다 도시 자체가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아서 작고 예쁜 도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다녀올 만하다. 도시들 간의 거리도 가까운 편이라 이 세 도시를 한 번에 묶어 탐방하는 일정을 잡는다면 나름 괜찮은 테마여행이 될 듯싶다.

찰스턴과 사바나 여행 | Deep South Old Cities




플로리다주 내에서 움직이는데도 하루가 꼬박 걸리다니. 포트 로더데일 (Fort Lauderdale)까지 350 마일을 달리고 나니 어느새 저녁이다. 어쩔 수 없이 일정에 넣었던 백만장자 유람선을 포기하고 (사건 3) 마이애미에서 저녁으로 스톤크랩 (Stone Crab)을 먹기로 했다. 숙소가 있는 포트 로더데일에서 마이애미까지는 얼추 한 시간이 걸렸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고 거리마다 야자수 다리에 전구를 칭칭 감아 화려하게 장식해 놓았다 (사진).
마이애미 지도를 보면서 겨우 찾아간 죠 스톤 크랩 (Joe's Stone Crabs). 플로리다 여행을 검색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강추한 스톤크랩 식당이다. 제대로 차려입은 사람들도 보이고 기다리는 사람도 꽤 많은 것이 엄청 유명한 식당인가보다. 
한 시간쯤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리스트에 이름 올리고 메뉴를 살펴보는데 뜨아. 이것이 뭔 다리길래 게다리 8개에 100불도 넘는단 말이냐. 이보시오, 강추하신 아낙네들. 값이 이쯤 되면 추천한다는 말 옆에 작은 언질이라도 줬어야 하는 것 아니오? 우리처럼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사는 저소득 학생신분으로 저녁 한 끼에 100불이 가당키나 하냔 말이오. 아니지, 달랑 다리 8개에 100불이니 곁다리 식사라도 시키는 날에는 택스까지 합쳐서 150불은 거뜬히 나올 판이오. (사건 4) 사람이 평소엔 아끼며 살다가도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게 되면 가끔씩 분수에 넘는 소비를 하게 되기도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소!!! 
황망해하는 나에게 그냥 큰맘 먹고 들어가서 먹을까 하며 시험하는 우리 집 바깥양반. 결정과 책임을 나에게 미루려는 얄팍한 술수다. 그래, 결심했어! 그냥 호텔로 가는거얏. 왕복 두 시간 걸린 마이애미 나들이. 본 것도 없고, 먹은 것도 없이 허무하게 끝나다. 3분카레로 돈은 굳었다만.



Day 3 | 최남단 찍고 오기
Miami - Key West - Miami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하지만 이곳은 달력을 몇 장 건너뛴 것 같은 날씨다. 여행 기간 내내 날씨가 오락가락해서 하루 뒤 일정을 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저녁에 날씨 채널 보고 다음날 뭐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마구잡이 여행. 모처럼 햇볕 쨍한 날이라기에 미국의 최남단, 키웨스트 (Key West)로 향했다.




이게 웬 횡재냐. 바다를 끼고 달리는 도로다. 아니, 바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달리는 길이다. 홈스테드 (Homestead)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키라고 (Key Largo)에서 키웨스트까지 4,500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진 플로리다키 (Florida Keys). 플로리다키의 섬과 섬을 이어 붙여 만든 이 길은 오버 씨 하이웨이 (Overseas Highway)라 부르는 127.5마일 (약 205킬로미터)의 US1번 도로다.




다리 밑에서 부는 바람. 
왕복 2차선 도로라 제한속도가 꽤 낮은 편인데 제한속도와 상관없이 섬과 섬을 잇는 다리를 건널 땐 본능적으로 속도를 줄인다. 까딱 잘못하다간 그대로 수장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플로리다키는 플로리다 반도의 끝에서 육지와 멀어지는 방향으로 늘어선 형상이라 키웨스트로 가는 길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멕시코만 한복판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더구나 망망대해로 이어지는 이 길이 의지하는 것이라고는 아슬아슬하게 섬과 섬을 잇는 왕복 2차선 도로가 전부. 육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가느다란 끈을 붙잡고 큰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가 버릴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었다. 다행히 오늘처럼 맑은 날은 아름다운 물색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바닷길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멀리 보이는 것은 세븐 마일 브리지 (Seven Mile Bridge). 미국에서 8번째로 긴 다리다. 이곳 플로리다의 바다는 캘리포니아의 바다와는 물빛, 하늘빛부터가 다르다. 캘리포니아에서 본 바다는 사람을 긴장시키고 치열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바다였다. 하지만 플로리다 바다는 완벽하게 반대편에 서 있있다. 사람을 쉬고 싶게 만드는 바다다. 붙잡고 있던 것들을 놓고 싶게 만드는 바다다.




세븐 마일 브리지를 달린다. 마음이 바쁘다. 다리 위에서의 풍경이 가슴 떨리게 기대된다. 그냥 맘껏 즐기고 싶기도 하고, 멋진 사진으로 남기고 싶기도 하지만 결국은 둘 다 제대로 못 한다. 수형이 앞을 보고 달릴 때, 나도 옆에서 앞을 본다. 하지만 수형이 옆을 보고 달릴 때도 나는 여전히 옆에서 앞을 보기 때문이다. 똑같이 긴장하고, 똑같이 앞을 보고 가는 것이 파트너에 대한 배려라는 생각이 든다. 수형이 긴장을 푸는 순간에는 그 몫까지 긴장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세븐 마일 브리지 오른쪽으로 평행하게 달리는 다리는 그 이름도 긴 the Knights Key-Pigeon Key-Moser Channel-Pacet Channel Bridge. 1935년과 1960년에 허리케인으로 파손되기 전까지 사용되던 다리다. 지금도 교각 대부분과 상부구조가 남아있긴 하지만 원래의 용도로 사용되기보다는 낚시터로 쓰인다.




옥빛 바다 위를 달리는 기분. 이런 때는 다리 옆 난간도 없었으면 좋겠다.




 오버 씨 하이웨이 (Overseas Highway)를 달려 도착한 키웨스트. 곳곳에 심어져 있는 야자수 때문에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공식적인 건 아니지만 키웨스트에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찍고 싶어하는 미국 최남단 (Southernmost Point Continental USA) 표지. 잠깐이지만 느낄 수 있었던 정복의 쾌감.

Extreme Points of the United States




이 동네에 있는 모든 것들에는 미국 최남단 (Southernmost)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 같다. 미국에서 제일 남쪽에 사는 기분은 뭐 좀 다른가?




생각과는 다르게 물빛이 예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와 더불어 동성연애자들의 파라다이스라 불리는 키웨스트.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동성연애자들로 호텔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진다.




키웨스트 같은 관광도시에 알러지가 있는 우리 부부는 최남단에 발도장 찍자마자 그대로 차를 돌려 내륙으로 향했다. 이제 막 점심시간이지만 키라고 (Key Largo)에 예약을 해둔 유람선 시간에 맞춰 가기엔 빠듯하다. 나 혼자 차에서 잠깐 내려 길거리 샌드위치를 사 들고 들어와 차 안에서 먹으며 오전 내내 달려온 길을 다시 돌아갔다. 마음은 급한데 제한속도 때문에 영 속도가 붙질 않는다. 여기서 시간 내에 도착하지 못했다면 다섯 번째 사건이 될 뻔했는데 정말 아슬아슬하게 유람선 출발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헐레벌떡 올라탄 유람선. 배가 바다로 나서자 갈매기들도 함께 따라 나선다. 승객들이 던져주는 과자 부스러기에 길들여진 반가축이 된 바다 갈매기들이다.




플로리다 키 중에서도 내륙에 가장 가까이 있는 키라고 (Key Largo) 섬에서 출발하는 이 유람선은 보통 배가 아니라 바닥이 유리로 되어있는 글래스 바텀 보트 (Glass Bottom Boat) 다. 수영도 좀 할 줄 알고 시간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기서 스노클링을 하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럴 형편이 못되니 이 정도도 감지덕지다.




유리창을 통해 배 안에서 바닷속을 감상한다는 발상은 참신했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고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한 바닷속 풍경이었다. 게다가 쉬지 않고 출렁이는 배 안에서 고개 숙이고 뚫어져라 유리 바닥을 응시했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 뭐겠는가. 우리 옆의 중국 아주머니께서 결국은 드신 거 다 게워내고 말았다.



Day 4 |  불운의 9336번 도로
Everglades National Park


크리스마스 아침. 우리가 묵은 호텔로 산타 할아버지가 다녀가셨나, 호텔에서 주는 무료 아침이 완전 진수성찬이다. 프라이스라인으로 55불에 비딩해서 잡은 마이애미 공항 근처의 메리어트 호텔 (Springhill Suites by Marriott Miami Airport South). 별 세 개짜리 호텔에서 무료 아침을 준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이었는데 그 양과 질은 정말 최고였다. 
오늘은 플로리다 반도 남부의 에버글래이즈 국립공원 (Everglades National Park)을 간다.




에버글래이즈 국립공원은 북미 최대의 습지를 보유하고 있는 습지 보전 측면에서도 아주 중요한 지역이라고 한다. 홈스테드 (Homestead)에서 들어가는 동쪽 입구와 마이애미 서쪽에 위치한 북쪽 입구 두 군데로 접근할 수 있다. 샤크 밸리 비지터 센터 (Shark Valley Visitor Center)가 있는 북쪽 입구는 트램 투어를 하면서 습지와 악어를 볼 수 있어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어니스트 코 비지터 센터 (Ernest Coe Visitor Center)에서 시작하는 공원의 메인 지역은 플로리다 9336번 도로를 타고 약 40마일을 달리며 습지에 형성된 다양한 식생과 식물군락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에버글래이즈 국립공원 지도 | Everglades National Park Map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다. 동쪽 입구로 들어와 달리니 드넓은 초원이 나타났다. 사자라도 숨어있을 것 같은 풀밭이다. 그런데 제길, 사자 대신에 경찰을 만났다 (사건 5). 꾸리꾸리한 날씨의 크리스마스 아침. 공원을 통틀어 이 길을 달리는 차라고는 손에 꼽기도 어려울 정도였는데 왜 하필 마주 오는 차가 경찰차였을까요. 차를 돌려 우리를 따라와 주십니다. 그냥 모르는 척 하는 게 어떻겠냐며 뷰포인트에 자연스럽게 차를 세운 수형이 갑자기 문을 열고 나간다. 미국에서 경찰에게 걸렸을 때 제1 수칙, 경찰의 지시가 있기 전에는 절.대. 문 열고 나가지 않는다. 위협을 느낀 경찰이 발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로 들어가세요'라는 지시를 받고 수형이 다시 얌전히 차에 올랐다. '속도가 좀 빠르시네요'라면서 면허증과 자동차 등록증을 제시하라는데, 저기 자동차 등록증이 뭡니까? 아니, 니들이 미국에 온지 4년 된 것(?)들 맞습니까. 
난 정말 몰랐다니까요. 해마다 자동차세 내고 받는 번호판에 붙이는 스티커가 붙어있던 종이가 그냥 영수증이 아니고 자동차 등록증이라는 걸 (용케도 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 여튼 크리스마스날 아침의 이 기막힌 운명이 경찰 아저씨에게도 안쓰럽게 느껴졌는지 가볍게 경고 때리고 사라져 주시는 친절을 보이신다. 메리 크리스마스에요 아자씨!




불운의 9336번 도로를 끝까지 달리면 플라밍고 비지터 센터 (Flamingo Visitor Center) 가 나오고 여기서부터는 뱃길뿐이라 차로는 더 갈 수 없다.




플로리다 베이 (Florida Bay). 물빛이 바다가 아닌 홍수 난 강물처럼 탁하다.




에버글래이즈 국립공원의 유명한 레드 맹그로브 (Red Mangrove) 군락. 일반적인 관속식물들과 달리 염분이 강한 지역에 번식하면서 생태계의 안정에 기여하는 아열대, 열대지방 해안 저지대의 중요한 식물군이다.




맹그로브에도 여러 종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레드 맹그로브는 가장 염분이 높은 곳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종으로 줄기에서부터 뻗어나와 아치를 이루는 뿌리 (Prop Roots)로 쉽게 구별된다. 이렇게 뿌리가 서로 엉켜있으니 큰 군락을 만들 수밖에 없겠다.




보기만 해도 몸서리치게 짠 이 바닷물에 이쑤시개 꽂듯 뻣뻣하고 단단한 뿌리를 박아넣고 살아가는 레드 맹그로브. 놀라운 능력이다.




자두가 너무너무 좋아해서 50번도 넘게 본 디즈니 백설공주 애니메이션을 보면 숲 속에 버려진 백설공주가 어둠 속에 숲을 헤맬 때 공주를 위협하는 나무들이 나오는데 지금 보니 이 레드 맹그로브를 모티브로 삼아 그린 장면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덩치 좋은 어깨 아저씨들이 '형님' 을 외치며 일렬로 서 있는 모습이 상상되는, 섣불리 지나가고 싶지 않은 길이다. 레드 맹그로브 군락의 보호를 위해 나무로 만든 생태 다리가 주차장에서부터 이어진다.




플로리다주의 공식 나무인 야자수 (Sabal Palmetto, Sabal Palm).




에버글래이즈 국립공원에서 나와 마이애미 (Miami 로 가서 유명하다는 쿠바 샌드위치를 먹기로 했다. 미국에서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추석이나 설 같은 대명절이라 상점이나 식당 대부분이 문을 닫는다. 쥐죽은 듯이 한산한 마이애미 거리에 간혹 보이는 사람들은 외지인들뿐이다. 결국 가게가 문을 닫아 쿠바 샌드위치는 못 먹었다 (사건 6). 대신 리틀 하바나 지역을 헤매다 유일하게 문을 연 식당에서 뭔지 알지도 못하는 음식을 먹어야 했다. 역시 우리는 도시에선 눈뜬장님들이여.




흐린 날의 마이애미 해변을 잠시 걸었다. 날씨 때문에 뒤죽박죽 돼버린 일정. 남국의 크리스마스를 텅 빈 마이애미에서 보내게 됐다. 산타 할아버지를 원정 배달까지 하시게 할 수 없어서 그냥 호텔에서 욕조에 물 받아놓고 물놀이 시키는 것으로 자두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대신했다. 사실 겸사겸사 장난감을 하나 주문했는데 막상 받아보니 크기가 개집만큼이나 커서 도저히 가져올 수 없었다. 왜 하필 개집이냐면 이게 얼핏 보면 꼭 개집처럼 보이는 인형의 집이라.
이렇게 조용히 크리스마스가 지나갔으면 좋았으련만.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벌어졌으니, 학교에서 빌려 온 노트북이 그만 사망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7). 예전에도 몇 번 맛탱이가 - 저속한 언어를 사용한 점 용서하세요 - 간 적이 있다더니 왜 하필 오늘, 여기서 자연사를 하는 것이니.
문제는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이 모두 함께 순장되어 사라져 버렸다는 끔찍한 사실. 다른 건 둘째치고 키웨스트 사진이 날아갔다는 게 정말 허망, 분노, 황당. 완벽히 어이가 상실되는 순간이었다. 여행 시작부터 불안하더니 결국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어떻해 어떻해, 키웨스트 또 가서 최남단 포인트 (Southermost Point) 증명사진 찍어야 하는 거니?



Day 5 |  스릴 넘치던 15분
Miami - Millionaire's Row - Tampa


이틀 전에 취소했던 포트 로더데일 (Fort Lauderdale) 유람선을 탔다. 이 유람선은 물길을 따라 백만장자의 저택을 보여주는 투어 보트이다. 미국 최고의 부자들이 모여 산다는 이곳의 이름은 밀리어네어스 로우 (Millionaire's Row).




포트 로더데일의 유명한 관광상품이라 일정을 변경해가면서까지 타긴 했지만 보는 사람이나 보여지는 사람이나 참 모두 어색한 투어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어떤 백만장자들은 서민 구경꾼들을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 장식을 해놓기도 하지만. 어느 백만장자가 꾸며놓은 플로리다의 녹색 크리스마스 장식.




포트 로더데일의 항구.
유람선에서 내리자마자 US41 도로를 타고 반도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이동한다. 오늘의 숙소는 탐파 (Tampa). 가는 길에 에버글래이즈의 샤크 밸리 (Shark Valley)에 들러 트램 투어를 하기로 하고 마이애미를 떠났다.




플로리다 반도의 동서를 관통하는 US41 도로를 타고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차들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알아보니 사고가 난 것 같은데 복구되는데 엄청 오래 걸릴 모양이다 (사건 8). 조짐이 좋지 않다. 샤크 밸리는 포기해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마구 엄습한다. 길에서 시간 버리느니 오다가 본 에어보트를 타러 가기로 했다.




한 배에 15명쯤 탑승하는 이 배는 뒤에 커다란 프로펠러가 달려 있는 에어보트다. 미국 유명한 범죄 드라마 'CSI Miami' 오프닝에 보면 습지를 가르며 질주하는 보트가 나오는데 바로 이 에어보트다.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물풀 가득한 습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5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굉음을 내며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보트. 운 좋게 맨 앞자리에 앉아 달리는 보트의 스릴을 그대로 만끽할 수 있었다. 물풀들 사이로 달리는 기분이 너무 신나고 좋아서 난 웃음만 나왔다. 계획에도 없었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이번 여행 중 제일 즐겁고 신나는 15분이었다. 나이 서른 넘어 이렇게 신나는 기분이 들 수 있다니.




배에 탈 때 왜 가이드가 두루마리 휴지를 뜯어줬는지 알겠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커서 다들 휴지로 귀를 틀어막고 있다.




가이드가 배를 멈추더니 갑자기 배에서 내린다. 꽤나 깊은 물인 줄 알았는데 무릎도 오지 않는 얕은 습지다. 하지만 워낙 방대한 지역이다 보니 이 습지가 보유하는 물의 양이 엄청나다고 한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라 가이드가 서둘러 배를 돌렸다.




선착장으로 가는 물길에 수련이 가득하다. 유유히 헤엄치는 새끼 악어도 몇 마리 보였다.




에어보트에서 내리면 간단 버전 악어 쇼를 보여준다. 악어까지 길들이는 인간의 능력이라니. 물체가 닿자마자 반사적으로 닫아버리는 악어의 무시무시한 본능을 이용한다. 이쯤 해서 또다시 계획이 틀어질 차례지. 원래는 US41 이나 I-75를 타고 플로리다 서부로 이동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수형의 지인과 연락이 닿는 바람에 올랜도로 올라가게 됐다 (사건 9). 루트가 변경되는 바람에 엄밀히 말하면 플로리다 '일주'는 못하게 되었다고 잠시 입이 나왔지만, 성격 좋은 내가 이해해야지. 올랜도 한인식당에서 지인들을 만나고 그 길로 숙소가 있는 탐파 (Tampa)까지 달렸다.



Day 6 |  자두를 위한 배려
Tampa - Busch Garden


여기는 플로리다 탐파의 부쉬가든 (Busch Garden)이라는 놀이공원. 나는 개인적으로 디즈니월드보다 더 좋았던 곳이다.




동물원과 놀이공원이 적절히 배합된 부쉬가든, 상업적인 캐릭터가 판을 치는 디즈니보다 훨씬 맘 편하고 다양한 놀이시설들을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오우, 노노노노. 우린 저런거 탈 수 없어요.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자두 또래의 어린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놀이시설이 충분히 갖춰져 있다는 점. 엄마 껌딱지인 자두가 처음으로 용감하게 혼자서 보트를 탔다. 어찌나 기특하던지.



Day 7 |  퍼펙트한 마무리
Fort De Soto Park - Clear Water


플로리다 일주의 마지막 날은 미국에서 제일 깨끗한 바다와 함께. 닥터비치가 선정한 2005년 미국에서 제일 깨끗한 청정비치 1위에 빛나는 포트 드소토 파크 (Fort De Soto Park) 다.




탐파와 세인트 피터스버그 (St. Petersburg) 남쪽에 자리 잡은 포트 드소토 파크는 조용한 바다를 즐기고 싶을 때 들르면 좋은 곳인 것 같다. 멀리 선샤인 스카이웨이 브리지 (Sunshine Skyway Bridge)가 보인다.




물빛과 하늘빛을 구분할 수 없는 아름다운 바다와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여전히 바다에 대한 공포를 안고 있는 자두. 저는 물론이고 엄마 아빠 역시 바닷가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한다 (사건 10). 결국 7박 8일의 여행 중 단 한 번도 바닷물에 손을 댄 적이 없는 우리 가족. 우리 같은 사람들이 과연 플로리다를 여행할 자격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마침내 그녀를 달래서 모래성을 쌓게 하는 데까지는 성공. 그러나 드디어 제일 큰 사건이 터지고 마는데.




모래성 쌓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우리 가족. 자전거를 빌려 타고 플로리다에서의 마지막 추억 만들기 한창인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우리 이쁜 자두 좀 찍어주려고 카메라를 켰는데 어라, 초점이 안 맞춰진다. 줌을 당겼다 풀었다, 스위치를 켰다가 껐다가. 렌즈의 줌이 끝까지 나와 주지를 못 한다. 아뿔싸, 모래밭에서 놀면서 모래 알갱이가 줌렌즈 사이로 끼어들어 간 모양이다. 설마 하며 이리저리 작동시켜보는데 나중엔 아예 줌이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는 황당한 상황이 돼버렸다. 더 이상 사진 찍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사건 11). 옛 동지 니콘 쿨픽스 995 에게 고별무대의 기회를 주려고 이러나.
새로 산 카메라가 데뷔 무대에서 못쓰게 되어버린 이 그지같은 상황에서 "여행 마지막 날이기 망정이지"라는 초긍정적인 코멘트를 날리는 나는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




비록 엉망진창이 된 일정에 사건투성이의 여행이었지만 난 정말 멋지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멕시코만으로 지는 노을과 함께.
하지만 신이시어,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으시다니 저희가 어찌하여 당신의 노여움을 샀는지요. 포트 드소토 파크에서 나와 클리어워터 비치 (Clearwater Beach) 에서 지는 해를 보려고 국도를 타고 올라가는 길. 생각지도 않게 길이 막혀 제시간에 클리어워터 비치에 도착하지 못했다 (사건 12). 결국 근처 샌드키 주립공원 (Sand Key State Park)에서 사라지는 태양의 뒷모습만 바라볼밖에. 혹시나 하고 들고 갔던 니콘 쿨픽스로 찍은 사진.



Day 8 |  집으로 가는 길
Clear Water, FL - Athens, GA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머릿속에는 온통 카메라 생각뿐.



에필로그

Epilogue

사건의 간략한 후기


이렇게 마지막까지도 뜻대로 되지 않은 우리의 플로리다 여행, 일관되게 일이 어긋난 바람에 되려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되었다.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한 후기를 남기며 플로리다 여행기를 마친다.
[사건 1 후기] 집에 돌아오자마자 눈살 찌푸리며 두고 온 밥통부터 열었다. 밥이 상하긴 했지만 한 번도 밥통 문을 열지 않은 관계로 역하게 변하지는 않았다. 아깝지만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
[사건 4 후기] 마이애미에서 포기했던 스톤크랩. 클리어워터에서 노을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크래비빌즈 (Crabby Bills)라는 곳에 들렀는데 훨씬 저렴한 가격에 스톤크랩을 맛보게 해주었다. 집게발 가득 찬 쫀득한 게살이라니. 정말 맛있었다.
[사건 7 후기] 일 년 뒤, 우리 과 컴퓨터 담당자 B가 하드를 복구해 사진들을 되찾아 주었다. 이렇게 플로리다 여행기를 쓸 수 있는 것은 다 B가 가진 신의 기술 덕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기억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사건 9 후기] 에버글래이즈 국립공원의 메인 볼거리는 샤크 밸리였다는 걸 알게 돼버렸다.
[사건 10 후기] 결국 첫 개시한 여행에서 우리의 후지 카메라는 장렬하게 전사했다. 애틀랜타에 있는 카메라 수리점에 가져다 20불을 주고 견적을 받았는데 160불이라는 웃기는 숫자가 나왔다. 이보시오, 이 카메라 139불 주고 샀거든! 오랜 고민 끝에 내린 나의 선택은 제2의 후지 파인픽스 V10 구입. 액서세리라도 건져보자는 알뜰한 생각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같은 카메라를 사고야 말았다. 그.러.나. 후지 카메라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으니····· 
이 여행,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니.

후지 카메라에 얽힌 기막힌 스토리 | My Chimera Camera Story



2006 플로리다 일주

2006년 12월 22일 - 12월 29일 


제1일 : Athens, GA - Jacksonville, FL

제2일 : Jacksonville, FL - St. Augustine, FL - Fort Lauderdale, FL

제3일 : Fort Lauderdale, FL - Key West, FL - Miami, FL

제4일 : Miami, FL - Everglades National Park - Miami, FL

제5일 : Miami, FL - Fort Lauderdale, FL - Tampa, FL

제6일 : Tampa, FL - Busch Garden - St. Petersburg, FL

제7일 : St. Petersburg, FL - Fort De Soto Park - Clearwater, FL

제8일 : Clearwater, FL - Athens, G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