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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여행/2006

제16편. 미대륙횡단 I 제2부: 호되게 치르는 신고식 (Driving Deep South, 2006/07)

Day 1 | 호되게 치르는 신고식
2006년 7월 8일

Athens, GA - Dallas, TX

850 mile  / 1,400 km


6:30 AM |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비장한 각오로 우리는 길을 나섰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집안도 대충 치워놓고, 누구라도 금방 찾을 수 있게 컴퓨터 모니터에 한국에 있는 가족들 연락처를 적어서 붙여놓았다.




9:30 AM | I-20을 타고 조지아를 벗어나 앨라배마로 들어서니 어느새 해는 한낮처럼 뜨겁다. 월마트 (Walmart)에 차를 대고 시금칫국에 밥을 말아 아침을 해결했다. 왜 하필 월마트냐고. 넓은 미국 땅을 여행하다 보면 월마트처럼 반갑고 편한 곳이 없다. 미국에선 실로 어딜 가나 월마트가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월마트는 우리 동네 월마트와 구조가 같다. 그래서 아무리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도 월마트에서만큼은 '나 초짜에요'라는 티 안 내고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어서 좋다. 집 떠난 나그네가 잠시나마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있는 휴식처라고나 할까. 물론 그들의 경영철학은 논외로 한 내 주관적인 경험이다.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 (Interstate Highway: 주와 주를 연결하는 제일 큰 고속도로망)를 달리다 보면 띄엄띄엄 나오는 도시나 마을들의 고속도로 주변 풍경이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비슷한지. 주유소부터 시작해 호텔, 식당, 스토어까지 어디서나 흔히 보이는 로고들로 온통 도배되어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곳을 여행하는 중에 눈에 익숙한 로고를 보면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특히 우리 같은 새내기 여행객들은 이렇게 갖추어진 시스템의 덕을 톡톡히 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유와 개성이 상징인 미국에서, 더구나 극과 극을 달리는 다양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거대기업들의 독점으로 점점 정형화되어 가는 일례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미시시피주 (Mississippi)에 들어서자 수형이 드디어 내게 운전대를 넘겨 주었다. 밤이면 밤마다 자두를 태우고 잠이 들 때까지 에센스 구석구석을 돌며 배회한 보람을 느낀다. 오죽하면 나 스스로 Walking Athens라는 별명을 붙였을까. 
미국에서 딴 면허마저 장롱면허가 되나 싶었는데 마침내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찾아왔다. 고속도로 운전은 처음이라 막상 운전대를 잡으니 떨리고 흥분됐다. 조신하게 잘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백미러를 보니 손잡이를 부여잡고 있는 수형의 모습에 맥이 빠진다. 미시시피의 주도인 잭슨 (Jackson)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수형에게 다시 운전대를 양보했다. 복잡한 대도시를 통과하는 것은 아직 무리다. 100 마일의 신고식을 무사히 잘 치러낸 것을 자축하다 보니 어느새 미시시피 강 (Mississippi River)를 건넌다. 이제 여기는 루이지애나 (Louisiana).




4:00 PM | 루이지애나 웰컴센터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주변에 펼쳐진 옥수수밭을 보며 한숨 돌린다.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그리고 루이지애나. 딥 사우스 (Deep South)의 경치는 어찌 이리 한결같이 단조로운지. 이렇게 웰컴센터에 들어와 눈도장이라도 찍지 않았다면 난 아마 아직도 조지아를 못 벗어난 줄 알았을 거다. 물론 첫 여행의 설렘과 두려움 속에 지루한 남부 풍경도 긴장하고 바라보았음은 당연한 사실.




7:30 PM | 장거리 여행 중 제일 운전하게 힘든 시간대는 바로 해 질 무렵이다. 피로가 몰려오는 시간이기도 하거니와, 지평선에 가까워 지면서 점점 더 강해지는 햇빛이 사람을 완전히 지치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이지애나를 관통하는 세 시간 동안 자두가 더위를 먹은 모양이다. 텍사스 웰컴센터에서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더니 출발한 지 얼마 안되서 붉은 물을 토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피를 토하는 줄 알고 식겁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옆에서 잠든 사이에 먹어치운 빨간색 젤리가 그대로 섞여 나온 것이었다.




내내 서쪽을 향해 달리니 해가 비치는 방향도 바뀌지 않을 거로 생각했었나 보다. 해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하루종일을 달렸으니 해가 들어오는 방향이 계속 달라지는 게 당연한데 그걸 제대로 막아주질 못해 한동안 직사광선을 그대로 쬐었던 것 같다. 자두가 너무 힘들어해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시나리오다. 애초에 떠나지 말아야 하는 여행이었는데 무리하게 밀어붙인 바람에 애가 이렇게 고생하는구나 싶은 게 너무 미안했다. 목적지인 텍사스 달라스 (Dallas)까지는 아직도 세 시간 이상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호텔 예약 취소가 안 되더라도 그냥 포기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호텔을 찾아 들어갔어야 했는데 도대체 무슨 깡으로 세 시간을 더 달려 끝내 달라스까지 갔는지 역시 무모한 부부다. 소심하다는 말이나 말든지. 파김치가 된 아이를 젖은 카시트에 앉힐 수 없어서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냥 내가 내내 안고 갔다. 확실한 것은, 더는 여행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11:30 PM |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자두를 씻기고 또 그 와중에 밥을 해서 저녁을 먹었다. 오는 길에 한 시간을 벌었으니 달라스 시간으로는 10시 반이다. 중간중간에 쉬긴 했어도 17시간이 넘는 여정이었다. 8박 9일의 일정을 짜다 보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어떻게 애를 데리고 처음으로 이런 장거리 여행을 하면서 첫날 일정을 이렇게 무리하게 짰는지 그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누가 계획을 짰냐고? 바로 나다. 그냥 여행 포기하고 텍사스 구경이나 조금 하다 집으로 가자고 의견을 모은 후 우리 셋 모두 깊은 잠에 빠졌다.






Day 2 | 낯선 곳을 달리는 두려움

2006년 7월 9일

Dallas, TX - Van Horn, TX

520 mile / 840 km


아침에 일어나보니 자두가 완전히 들떠있다. 프라이스라인 (Priceline.com)에서 비딩으로 겨우 30불에 낙찰받은 싸구려 호텔이었지만 난생 처음으로 호텔에 온 자두. 어린이 프로를 보며 침대에서 구르고 뛰고 하는 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싶다. 호텔에서 주는 아침까지 먹고 나더니 최상의 컨디션으로 회복한 그녀. 오늘 밤도 호텔에서 잘 수만 있다면 지구 끝까지라도 갈 태세다. 네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독한 것들, 그대로 운전대를 서쪽으로 향한다.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 윈드밀 (Windmills). 조지아를 벗어났다는 것이 이제서야 실감 난다.




어제까지는 길을 따라 숲과 타운이 반복되는 풍경이 이어졌다. 그 익숙한 경치가 오늘 달라스를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I-20 도로 양옆으로 담장을 이루던 교목들이 사라지니 시야도 함께 넓어졌다. 농경지와 관목들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그마저도 보이지 않고 어느새 온통 황량한 벌판뿐이다. 네브라스카 (Nebraska)와 와이오밍 (Wyoming)에서 시작되어 내려온 미국 고평원 (High Plains)의 최남단 지역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 거대한 땅을 가로지르며 차창 밖으로 대륙의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는 여기는 바로 세상에서 제일 큰 자동차 극장이다. 바로 이것이 자동차 대륙횡단의 묘미가 아닐까. 영화 시작한 지 5분도 안지났는데 나는 감동의 도가니탕에 푹 빠져 버렸다.




눈앞에 펼쳐진 허허벌판은 영락없는 황무지. 게다가 제한속도 80마일 (130킬로미터)이라니. 아닌 게 아니라 이 후덜덜한 제한속도는 미국에서 제일 높은 제한속도다. 이렇게 잘 닦여진 길에, 자유롭게 달릴 수 있는 스피드 리밋까지. 그런데 달리는 차가 없다. 타운이라고 부를 만한 곳도 거의 나타나질 않았다. 둘러봐도 사람이 살만한 환경은 아닌 것 같다. 타운은 커녕 주유소도 보이지 않아 마음 졸였다. 점심을 먹으려고 모처럼 나타난 작은 타운으로 들어갔다가 섬뜩한 도시 분위기에 놀라 재빨리 빠져나왔던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미국에서 고스트 타운 (Ghost Town)이라고 부르는 유령도시, 즉 아무도 살지 않아 버려진 도시였던 것 같다. 이 자동차 극장에서는 은하철도 999도 상영해주는 모양이다.




3일에 걸친 800마일의 텍사스 횡단. 7월의 뙤약볕 아래 인적없는 황야를 달리는 지루한 마라톤이 계속된다. 우리와 이 도로 외에는 인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가끔씩 모래 폭풍을 조심하라는 경고문이 나타나 움찔하게 할 뿐이다. 아마도 반경 수 마일 내에 살아있는 인간은 우리 밖에 없을 것이다. 지루함을 넘어서 두려움이 엄습한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경험해 본 적 없는 색다른 공포다. 그 공포감은 벌판에 갑자기 등장한 고철 기계들로 인해 극에 달했다. 조종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기계들은 저 혼자 알아서 쉬지 않고 방아를 찧어대고 있었다. 뜬금없이 나타나 황무지를 지배해버린 기계 단지를 보고 쓸데없는 상상력이 발동했다. 닥터 이블이 지구를 정복하기 위해 비밀리에 조성한 아지트를 목격한 것은 아닐까 하는.




나중에 찾아보니 펌프잭 (Pumpjack)이라고 하는 이 기계는 압력이 낮은 지역에서 석유를 끌어올리기 위해 설치된 일종의 오일펌프라고 한다. 방아를 찧는 모습이 꼭 당나귀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너딩 덩키 (Nodding Donkey)라고도 부르는데 옛날 할머니 집에 가면 볼 수 있었던 수동 수도 펌프가 생각났다. 펌프잭은 윈드밀과 더불어 텍사스의 상징이라고 한다.




넓디넓은 황무지 땅을 개간하면 엄청난 농토가 되겠다 싶은데 바로 이 질긴 생명들이 땅 속 깊이 뿌리를 박고 인간들에게 제 땅을 내주지 않는다고 한다. 워낙 비가 내리지 않는 지역이다 보니 물을 찾아 뻗어 나간 뿌리들이 길고 깊게 박혀있는 데다 서로 얽혀있기까지 해서 땅을 고르는 일이 영 쉽지 않은 모양이다. 놀라운 생명력으로 이 척박한 사막을 차지한 이 땅의 진정한 주인들이다.





길고 길었던 I-20 도로가 동남쪽에서 올라온 I-10과 합류하면서 마침내 끝이 났다. 조지아 애틀랜타에서부터 1,250마일 (약 2,000킬로미터)의 긴 여정 동안 우리를 이끌어준 I-20 도로*. 그 끝을 알리는 표지판을 보는 기분이 묘했다.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는 미국에서 제일 큰 도로망인데 그중에서도 0번, 5번대 도로는 대륙을 각각 횡단, 종단하는 도로로 여러 개의 주에 걸쳐 이어지기 때문에 그 시작과 끝을 보기가 쉽지 않다. 일상생활에서는 도로의 일부 구간만을 달리는 것이 고작이라 한없이 뻗어 있을 것 같은 이 도로에 끝이 있다고 상상하기가 어려웠는데 막상 END라는 단어를 보니 꼭 완벽해 보이는 누군가의 치명적인 약점을 목격한 느낌이랄까. 

2011 Updated
| 현재 총 1,540마일의 I-20 구간 중 1,460마일을 (95%) 주행했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길의 마지막을 보는 서운함도 잠시, 해 질 무렵 하룻밤 묵어갈 잠자리를 찾아야 하는 나그네의 본분으로 돌아간다. 전날 다들 너무 고생했기 때문에 조금 일찍 하루를 마감하기로 하고 웰컴센터에서 받은 호텔 쿠폰북에 나와 있던 텍사스의 반혼 (Van Hor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여행 두 번째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