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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여행/2006

제17편. 미대륙횡단 I 제3부: 한여름 사막의 아스팔트에는 계란 후라이도 된다는데 (Driving Desert, 2006/07)

Day 3 | 멀고도 먼  캘리포니아
2006년 7월 10일

Van Horn, TX - San Diego, CA
850 mile / 1,400 km


Feb 2011 | '신용문객잔'. 임청하 주연의 오래된 무협영화다. 흙먼지 날리는 황무지 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은 용문객잔. 겉으로 보기엔 외로운 방랑자들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해주는 조용한 여관이지만 하나같이 사연 있는 인간들이 모여드는 객잔에선 의미 없는 칼부림이 끊이질 않는다. 어제 하루종일 뜨거운 황야를 달려 도착한 작은 마을 반혼 (Van Horn). 이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용문객잔으로 향하는 나그네가 된 기분이 들었다. 사막에 자리 잡은 이 외로운 마을은 오로지 오가는 객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쓸쓸한 기운 가득하다.




고속도로변에 고도를 나타내는 표지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달라스를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높아지던 고도는 반혼에 다다르기 전에 이미 천 미터를 훌쩍 넘었다.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제일 큰 치와와 사막 (Chihuahuan Desert) 지대에 들어선 것이다. 혼자서 '치후아후안'이라고 열심히 발음을 연습하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치와와란다.
설마 강아지 치와와? 맞다. 치와와는 멕시코 품종의 개라고 한다. 하지만 치와와라는 이름이 별로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은 치와와 사막이다.




고도가 높은 치와와 사막 지역에서는 지형이 지금까지와는 눈에 띄게 달라지며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크고 작은 산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도가 1,500미터에 이르는 산들이지만 지대 자체가 높은 지역이다 보니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덤불들만 듬성듬성 자라있는 민둥산이라니. 옷을 입다 만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민망하기 짝이 없다. 잠깐, 지금 보니 맨들맨들한 이 산의 겉모습이 털이 짧은 치와와의 피부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차 안에 너무 오래 있었나. 갑자기 눈앞에 신기루가 보인다. 도시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 도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대도시의 갑작스런 출현에 우리 모두 당황했다. 딥 사우스를 달릴 때는 꾸준히 크고 작은 도시와 타운들이 나타나다가 대평원에 들어서면서 인적이 끊어졌는데, 그렇게 근 600마일을 황무지 벌판과 사막만 보며 달려오다 생각지도 않게 큰 도시를 맞닥뜨렸으니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다. 
도시가 좀 더 가깝게 분포하는 서쪽에서부터 왔으면 아마 이런 느낌은 들지 않았을 것 같다. 보통은 도시 진입 전부터 외곽의 주거 지역이라든지 기타 기반 시설들이 나타나면서 도시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인을 주는데 여기는 도시와 황무지가 마치 뚜렷한 경계를 가지고 나누어진 것처럼 보였단 말이다. 게다가 도시의 규모가 반혼 같은 작은 타운 수준이 아니라 웬만한 대형마트들은 다 찾아볼 수 있는 중소도시 수준을 넘어버린 꽤 큰 도시라 과연 황무지 한복판에 이런 도시가 세워진다는 것이 진짜 가능한가 하는 의구심까지 들 정도였다. 
여기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물과 음식을 구하는 걸까. 보아하니 자체적으로 해결할 환경은 아닌 것 같고 동쪽에서부터 조달하는 것도 절대로 아닐 텐데 이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한 물자들을 다 어디서 공수해 오는지 그저 놀람의 연속이었다. 




반은 멘붕 상태로, 반은 갑작스럽게 몰려드는 차들 때문에 바짝 긴장한 상태로 달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도시의 주택가 풍경이 굉장히 낯이 익다. 하지만 한편으로 몰려오는 어색한 기운. 아, 서울!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과 건물하며 지붕의 모양새가 영락없이 서울의 주택가와 비슷하다. 미국에서, 그것도 사막 한복판에서 서울을 보았으니 어색할 만도 하다. 
이 오아시스 같은 도시의 이름은 엘파소 (El Paso). 실제로 엘파소는 미국에서 19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로 애틀랜타보다도 1.5배나 많은 사람이 사는 말 그대로 대도시였다.


미국에서 인구 도시 순위 | List of United States Cities by Population




엘파소는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멕시코의 후아레즈 (Juárez) 와 맞닿아 있다. 지도를 보니 우리가 달리는 I-10에서 멕시코 국경까지 1마일도 채 되지 않았다. 도로 왼편으로 멕시코 도시를 보면서 달리는 기분이 신났다. 
사진 속의 산에 쓰인 저 글자는 'CD Juarez, La Biblia es la verdad. Leela.' 인데 그 뜻은 'Ciuadad Juarez, The Bible is the truth. Read it.' 즉, 성서를 권하는 메세지다. 엘에이에 있는 HOLLYWOOD 사인을 떠올리다 뜻밖의 의미에 잠깐 놀랐지만 후아레즈가 치안부재의 마약소굴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메시지가 전하는 절실함이 와 닿았다.




엘파소를 벗어나니 또 다시 사막이 시작된다. 엘파소는 텍사스의 서쪽 끝. 800 마일에 걸친 텍사스 대장정을 끝내고 드디어 뉴멕시코에 들어섰다. 뉴멕시코의 동남부는 텍사스의 서부와 마찬가지로 치와와 사막 지역이라 주변 경관은 전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뉴멕시코를 거의 다 통과했을 무렵 양옆으로 하얀 백사장이 나타났다. 길게 뻗은 산맥 아래 하얗게 펼쳐진 모래밭. 금방 지나치고 말았지만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풍경과 모래밭을 가르며 달리던 느낌이 인상적이어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언제고 다시 가보고 싶어서 지도를 찾아보니 뉴멕시코 로즈버그 (Lordsburg)에서 서쪽으로 10마일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로즈버그 플래야 (Lordsburg Playa) 라는 드라이 레이크 (Dry Lake)였다.




드디어 애리조나다. 이제는 얼마나 왔는가보다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하게 된다. 지금까지 6개 주를 거쳐 왔다는 사실보다 이곳만 지나면 캘리포니아에 도착한다는 사실에 더 흥분된다.

엄마, 우리 고래 보러 언제가? 

삼 일째 듣는 질문이다. 자두가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지루한 여행에 선뜻 동참하게 된 이유가 바로 고래다. 샌디에고에 도착하면 씨월드에 가서 고래를 보여주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고래 보러 가자고 해서 나섰는데 하룻밤이 지나도 이틀 밤이 지나도 고래는 커녕 작은 웅덩이 하나 보이지 않는 곳만 달리고 있다. 정말 미안해 죽겠다. 고래 보러 가는 길이 진짜 왜 이렇게 먼 거야.




아리조나 윌콕스 (Willcox)라는 곳을 지나면 고속도로 휴게소 (Rest Area)가 하나 나오는데 그곳의 바위들이 무척 특이하게 생겼다. 여행기를 쓰면서 찾아보니 휴게소가 위치한 곳은 텍사스 캐년 (Texas Canyon)이라는 곳이다. 독특한 모양의 이 바위들은 드래군 락스 (Dragoon Rocks), 우리말로는 용기병 바위라고 번역하면 될까.




방금 캡처한 컴퓨터 모니터 화면. 블로그 화면에, 위키피디아, 포토샵, 지형 지도와 구글 어스까지 띄워놓았다. 박사 논문이라도 쓰려는가. 
난 여행기를 쓰는 게 정말 재밌고 좋다. 특히 이 2006 미대륙횡단기를 쓰면서 미국의 지리나 지형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고 있다. 만약 이렇게 따로 힘들여 자료를 찾지 않고 내 기억과 사진에만 의존해서 여행기를 쓴다면 아마 모든 글이 세 마디로 요약될 것이다.

달렸다 좋았다 힘들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여행은 오로지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에 가서 태평양 바다를 보고 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캘리포니아까지 갔다가 주어진 시간 내에 무사히 돌아오는 것을 목표로 한 여행이었기 때문에 오가는 과정, 대륙횡단이라는 흔치 않은 기회를 통해 보고 지나게 될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 준비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가 횡단 중에 제대로 찍은 사진 한 장이 없는 것도 다 그래서다. 무조건 달리기만 하면서 길바닥만 보고 온 무지한 여행이었다. 그렇게 기억 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우리의 여행이 이 여행기를 통해 다시 태어나고 있다. 나와 수형의 기억의 단편들을 조합하고 몇 장 안 되는 허접스러운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보고 느낀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지도와 인터넷, 최근에는 구글어스 (Google Earth)까지 불러놓고 마치 네티즌 수사대가 된 것 마냥 열심히 여행을 재구성하다 보니 정말 다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든다. 여행은 여행기를 쓰면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 같다.




텍사스 캐년을 지나면서 1,500미터에 달했던 고도가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다. 치와와 사막의 서쪽 경계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미대륙 사막 여행기 | United States Deserts




애리조나 투산 (Tucson)을 지날 때쯤 되니 드디어 선인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여행 당시에는 선인장이 안 보이다 나타나는 것인지, 같은 사막인데 왜 텍사스에서는 선인장이 안 보였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것들이 궁금하고 답도 알고 있다. 선인장이 자라는 이곳은 소노란 사막 (Sonoran Desert). 미국의 4대 사막 중 하나로 애리조나의 남서부와 캘리포니아의 동남부를 포함하는데 사와로라고 부르는 이 독특한 형태의 선인장은 소노란 사막만의 특징이다. 선인장을 보니 되게 반갑고 좋았다. 진짜 애리조나에 온 기분이 든다.


2008 땡스기빙 미대륙 남부 일주 사막 여행기  




하루 중에도 해가 제일 뜨거운 오후 시간에 애리조나를 통과하려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중간에 차를 세우고 그늘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나왔는데 그 사이에 차가 햇빛에 어찌나 잘 달구어졌는지 손을 댈 수도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조지아 태양도 만만치 않은데 역시 애리조나다. 스스로는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자라지 않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까 싶었다. 물론 조지아 같은 촌구석에서 어떻게 사느냐고 하는 애리조나 사람도 있겠지만서도. 
이런 날씨에는 아스팔트에 계란 후라이도 할 수 있다는데 계란이고 달걀이고 내가 먼저 찜 될 지경이라 후다닥 차에 올라타 에어컨 틀기 바쁘다.
투산을 지나 피닉스 (Phoenix) 못 미쳐서 I-10 도로가 I-8 도로로 갈라졌다. 샌디에고로 이어지는 I-8 도로. 캘리포니아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아, 드디어 캘리포니아 입성이다. 비행기 타고 두어 시간 만에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렸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감동적이었다. 어렵게 만난 캘리포니아주의 웰컴 싸인을 찍으려고 10분 전부터 벼르고 있는데 이 기쁨의 순간을 와셔액으로 초 치는 수형의 놀라운 능력. "아니 난 사진 잘 찍으라고.." 




주 경계선을 통과하자마자 사방에 모래 언덕이 나타났다. 뜬금없이 나타난 모래사막의 풍경에 어리둥절했다.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솔직히 말하면, 이 여행을 준비하면서 사람들이 텍사스/애리조나 사막 얘기를 꺼낼 때 내가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사막이 바로 이런 사막이었다. 그래서 텍사스를 달리면서도 이런 모래사막이 언제 나오나 계속 기다렸더랬다. 텍사스와 뉴멕시코를 지나고 애리조나를 통과하면서 비로소 이곳의 사막은 내가 생각하던 사막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랬는데 캘리포니아에 들어서면서 웬 모래사막? 
찾아보니 이곳은 임페리얼 샌드 듄스 (Imperial Sand Dunes) 또는 글래미스 듄스 (Glamis Dunes)라고 부르는 사구 지역으로 Off-Highway Vehicle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한다. 출입통제구역이 아닌 줄 알았으면 한번 가보는 건데 너무 아쉽다.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 거대한 산맥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첩첩이 길게 뻗은 산맥이다. 이 큰 장벽을 어떻게 돌아가나 싶은데 이게 웬걸, 도로가 나 있는 폼새를 보니 둘러가기는커녕 이대로 달리다간 그대로 산맥을 들이받게 생겼다. 마침 내가 운전을 하던 중이라 더 실감이 났다. 도대체 이 길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인지 긴장되고 흥분되고 궁금했다. 그런데 이건 정말 놀랍다. 정면승부라니. 산맥에 점점 가까워진다.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이 견고한 장성인 줄 알았더니 굽이굽이 산맥을 관통하는 도로가 숨어있다. 꼭 영화 '인디아나존스'에서 성배가 모셔진 신비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 도로가 만만치 않다. 경사가 보통 심한 게 아니다. 1차선에서 트럭 몇 대가 거북이걸음으로 겨우겨우 산을 올라가고 있었다. 시빅이도 힘을 못 받는 모양이다. 차가 미어지도록 짐을 실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슬슬 올라가는데 엔진 소리가 이상하다. 평소와 다르게 소리가 아주 약한 데다 '윙'하는 금속성의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이러다 차가 퍼지는 거 아닌가. 곤하게 자는 수형을 깨워서 물어보니 자긴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면서 도로 잠을 청한다. 이런 무책임한 남자같으니라고. 
그렇게 한참 올라갔을까, 긴장과 불안한 마음에 침을 꿀꺽 삼켰다. 순간 갑자기 '뻥' 하면서 모든 소리가 정상으로 들리는 게 아닌가. 참 어이없네. 고도가 갑자기 높아지면서 기압 때문에 귀가 막히는 바람에 그렇게 들렸던 것을.
초짜 나그네는 아주 작은 것에도 예민한 법이다.




샌디에고로 가는 이 마지막 관문은 페닌슐라 산맥 (Peninsular Ranges)이다. 애리조나 투산 근처에서부터 급격하게 낮아지기 시작한 해발고도가 캘리포니아를 들어서면서 해수면과 같아졌는데 페닌슐라 산맥을 만나면서 다시 1,500미터 이상으로 올라갔다. 애리조나에서 봤던 산맥들과 해발고도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 낮은 지대에서 봤기 때문에 더 거대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마음은 이미 샌디에고에 도착했기 때문일까. 산맥을 넘는 마지막 80마일 길이 너무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해 질 무렵의 강한 햇빛이 굽이진 산맥 틈새로 레이져 광선 쏘듯이 눈을 찔러대는 바람에 운전이 쉽지 않았다. 
마침내 도착한 샌디에고. 희한하게도 도시가 산의 사면, 즉 언덕의 내리막길에서부터 시작한다. 왜 이렇게 짓기도 어렵고 살기도 불편한 언덕에 집들이 많은가 했더니 아무래도 땅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다. 중앙의 그 넓은 땅덩어리 다 두고 바다 가까이 언덕배기까지도 들어차 있는 집들을 보니 그만큼 환경에 민감하고 약한 인간이라 터전을 이루고 살 수 있는 조건이 까다롭구나 싶다.
오늘도 16시간이 넘는 일정이었지만 시간을 벌면서 갔기 때문에 샌디에고에는 밤 10시 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다른 모든 것은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일단 지친 몸을 뉘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