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 2008 | 집에서 한 시간밖에 안 걸리는 애틀랜타에 하이웨이 (Highway, 고속도로)를 타고 나가는 것이 어려워 돌아돌아 몇 시간씩 걸려 한국 장엘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좋게 말하면 조심성 있는 거지만, 사실을 인정하겠다. 우리, 소심한 A형 부부 맞다.
한국에선 장롱면허 소지자였던 우리가 미국에 와서야 처음으로 운전을 하게 됐다. 핸들을 잡은 수형도, 옆에서 길을 보는 나도 모든 것이 늘 조심스럽기만 했다. 한번은 수형과 둘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의 마지막 목표는 '눈 오는 날 애틀랜타 공항 왕복하기'라고.
눈이 귀한 곳이라 눈 오는 날 공항 왕복의 기회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미 오래전에 '비 오는 날 애틀랜타 공항 왕복'까지는 성공한 어느 휴일 오후. 그냥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조지아 지도를 펼쳐놓고 앉아 열심히 들여다 봤지만, 도대체 어디를 가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그저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데 갑자기 수형이 나가자고 한다. 원래 평소에도 가방 같은 건 잘 안 들고 다니는 성격이라 맨몸에 입던 옷 그대로 서방님을 따라 나섰다.
수형이 차에 시동을 걸더니 나더러 무작정 동서남북 중 하나를 고르란다. 어딜 고르던 이 몸을 모셔갈 곳이 있단 말인가. 갑자기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수형에게 남쪽으로 가자고 주문을 하니 오케이 하며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큰길 따라 주구장창 직진만 하는 수형. 도대체 어딜 가는 거냐고 물어봐도 건성으로 그냥 가는 거라고만 하고, 얼마나 가느냐고 물으면 한 시간만 가면 된다고 하고.
목적지를 모르니 맘이 불안해서 주위 경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시간쯤 달렸을까. 시계를 보더니 갑자기 '한 시간 다됐네'하며 그대로 다시 차를 돌리는 수형. 어이없어 하는 나에게,
'한 시간만 달린다고 했잖아.'
갈 때는 호기심, 초조함, 온갖 로맨틱한 상상에 들떠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니, 돌아오는 길에는 슬슬 차창 밖 경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가한 일요일 오후, 조지아의 조용한 시골 풍경을 보니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이때부터 시작한 것이 우리 부부의 일명 묻지마 한 시간 드라이브.
우리는 마음이 동할 때마다 한 시간 드라이브를 다녔다. 동서남북 사방팔방, 에센스에서 뻗어 나가는 도로들을 한 시간 동안 달렸다가 미련없이 되돌아오는 그야말로 순수한 드라이브 여행이었다. 준비도 필요 없고 계획도 필요 없이 충동적으로 떠나는 대책 없는 여행이었지만 그만큼 자유로운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아는 것이 없으니 기대하는 것이 없고, 아는 것이 없으니 가는 곳마다 배우는 것이 있었다. 본 것이 없으니 보이는 것마다 감동과 새로움의 연속이었고, 본 것이 없으니 작은 것 하나까지도 소중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한번은 한 시간 드라이브 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조지아 주 경계선을 넘어 사우스캐롤라이나로 진입한 적이 있는데 '웰컴 투 사우스캐롤라이나'라는 사인을 보던 순간, 거짓말 조금 보태서 판문점 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의 경계선을 넘는 일은 남의 동네 마실가는 정도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국립공원, 그리고 대도시들을 다니며 최고라고 불리는 것들만 보고 다녔더니 이젠 어지간한 것을 보아서는 자극을 받지 않게 되었다. 슬프고 아쉽다.
언제부터 더는 한 시간 드라이브 여행을 떠나지 않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친숙한 곳을 달리며 익히고 배운 노하우들이 이후 낯선 곳으로의 여행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음은 분명하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소중한 재산이다.
충동적이고 자유로운 시간들이었기 때문일까, 도대체 사진 한 장을 찾을 수가 없다. 유일하게 사진이 남아있는 곳이 이 여행기에 올려진 하트웰 댐이다.
2004년 어느 이른 가을날, 한 시간 드라이브 끝에 우연히 도착한 하트웰 댐. US29번 도로를 타고 조지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경계를 이루는 사바나 리버 (Savannah River)를 건너다 만난 곳이다. 에센스에 살면서 늘 숲과 들판만 보며 지내다 오랜만에 물을 만나니 참 반가웠다. 댐이 물을 가두며 만들어 낸 하트웰호 (Lake Hartwell)의 수평선이 보였다. 마침 그 너머로 해가 지는데 그 노을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꼭 하늘이 불에 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붉은 해가 서서히 가라앉고 하늘이 검푸른 빛으로 변할 때까지 하늘과 물을 바라보았다.
해지고 어두운 저녁이 되어서야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가는 길. 고픈 배를 잡고서 수형과 둘이 집에 오는 내내 가요 릴레이를 했다. 서로 좋아하는 노래들을 번갈아 부르다 나중엔 같이 듀엣곡 하나 연습해 보자고 여러 곡을 시도해봤지만, 우리 둘의 노래 취향이 너무 달라서 결국 부부 듀엣 결성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즐거운 시간이었다. 지금은 노래를 부르고 싶어도 자두가 시끄럽다고 못 하게 하는 바람에 입 한번 벙긋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하트웰 댐에서의 시간이 더 간절할 따름이다.
눈과 마음이 가난하던 시절. 일상의 소소한 재미에서 행복을 찾던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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