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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여행/2005

제14편. 사계절 시리즈: 겨울여행, 준비되지 않은 공주의 디즈니월드 입성기 (Disney World, 2005/12)

2005 겨울여행
준비되지 않은 공주의 디즈니월드 입성기
2005년 12월


허리케인 시즌이 끝나는 11월부터 플로리다는 단연 겨울 최고의 관광지. 수영도 못하고 놀이동산 광팬도 아닌 우리 부부에겐 그다지 끌리는 조건이라 할 수 없지만 2주나 주어지는 크리스마스 휴가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여행지가 가깝게 있다는 건 여전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05년 우리 가족 첫 겨울 플로리다 여행. (부모는 등골이 휘지만) 아이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디즈니의 세계로 향한다.




올랜도 (Orlando)로 가는 길에 플로리다에 사시는 S 선배네 집에 들렀다. 낚시광인 선배를 따라 시더키 (Cedar Key)에 갔는데 한 마리도 못 잡고 왔다. 썰물이라 고기가 없었다는데 진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꼬마 강태공 나가신다. 아웃도어맨인 선배 덕분에 우리의 플로리다 여행에 즐거운 추억이 또 하나 추가되었다. 그리고 시더키 항구에서 본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웠던 노을은 그 추억에 감동까지 선사해주었다.


잊을 수 없는 일몰의 순간들 | Memories of Sunset
http://mrscho.tistory.com/76




디즈니월드 연간 회원권을 끊을 정도로 디즈니 골수팬인 S 선배에게서 몇 가지 팁을 전수받고서 다음날 새벽같이 올랜도로 향했다.




디즈니에서 세 살부터 입장료를 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두 살짜리 자두가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라고는 덤보와 회전목마가 고작이다. 한 사람당 80불이나 내고 들어간 놀이동산에서 한 시간씩 기다려 덤보를 타야 하는 내 심정은 누가 헤아려줄까.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디즈니월드에 도착하자마자 자두를 데리고 처음 들어간 곳은 3D 극장. 입체 안경을 쓰고 어두운 극장에 앉아 있는데 막이 열리자마자 공포영화에서 귀신 나오듯 도널드 덕이 튀어나온다. 입체 안경 쓰고 실감나게 도날드 덕의 등장을 경험한 자두가 완전히 패닉 상태가 되어 백 퍼센트 경계 상황에 돌입한다. 지금부터 명령을 내리니 즉각 실행하라. 어둠으로 들어가는 모든 실내 놀이기구를 3D 극장과 동일시하라. 햇빛을 볼 때까지는 무조건 눈을 질끈 감고 외부와 단절하라. 엄마 아빠의 어떤 꼬드김에도 절대 눈을 떠서는 안 된다. 경망스런 도널드 덕씨가 원망스럽다.




수형이 더 좋아한 디즈니 퍼레이드.




디즈니 캐릭터가 뭐지요? 미키마우스에도 시큰둥, 공주들을 보고도 시큰둥.




그러더니 눈을 반짝거리며 달려가는 곳은 바로 아이들 놀이터. 우리 자두 공주님은 궁궐에 입성하실 준비가 전혀 안 되신 줄 아뢰오.




밤이 되자 마법의 성에 불이 켜졌다. 디즈니월드의 백미인 불꽃놀이 쇼. 아까 도널드 덕보고 놀란 자두 가슴, 불꽃놀이 보고 완전히 식겁한다. 불꽃 터지는 소리가 무섭다며 처음부터 끝까지 아빠 잠바 속에 숨어서 바들바들 떨던 그녀. 이럴 줄 알았다면 애니멀 킹덤에나 가는 건데 말이다.




집으로 가는 길. S 선배가 플로리다에는 냉천 (Springs) 이 유명하다고 추천을 해줘 가는 길에서 제일 가까운 이츠터키 스프링 (Ichetucknee Springs State Park)에 들렀다. 특별한 기대 없이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데 눈앞에 보이는 옥색 연못이라니.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아름다운 숲 속의 샘을 보고 너무나 놀랐다. 12월 말인데도 수영을 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바깥 날씨는 조금 쌀쌀했지만 물속은 따뜻하다고 한다. 플로리다에는 해변만 유명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냉천들이 플로리다 반도 내륙 곳곳에 숨어있는 줄은 몰랐다. 바다와 인접한 냉천에는 겨울이면 매너티 (Manatee) 가 헤엄쳐 들어온다고 한다. 매너티는 뱃사람들이 인어라고 착각했다는 바다 동물로 사진을 보니 생김새가 바다사자와 비슷하다.




숲 속의 연못이 모두 다 저렇게 맑다면 산신령님이 거처하시기 불편하실 듯. 나무꾼들이 도끼를 떨어뜨려도 어디에 내 도끼가 떨어졌는지 금세 찾을 수 있을 거다.




물색이 어찌나 이쁜지 플로리다 바다도 저리가라 할 정도다. 여름이면 이츠터키 강을 따라 튜브를 타고 내려갈 수 있다는데 그 튜브 너무 타보고 싶다. 커다란 튜브에 몸을 기대고 강을 따라 유유히 내려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렌다. 래프팅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이 튜브 한번 타봤으면.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 바라는 게 소박하고 기쁘게 하기 쉬운 사람인 거 같다. 내가 얼굴이 이뻐서 남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면 정말 여러 남자한테 속아서 상처 많이 받았을 듯.




이렇게 2005년 사계절 시리즈가 끝이 났다. 자두 콧바람 쐬어 준다는 핑계로 우리가 참 잘 다니고 있는 것 같다. 자두가 돌아와서 너무 좋다.






별책부록
공주에 빙의된 따님의 디즈니 재방문
2007년 12월


백설공주 비디오를 보고보고또보고 그러다 모조리 다 외워버린,
신데렐라 속편 비디오를 먼저 보는 바람에 정작 신데렐라 원작은 알지 못했던,
잠자는숲속의공주의 금발 가발을 쓰고는 검은 머리 안 보이게 해달라고 떼쓰던,
인어공주가 되고 싶다고 하여 인어 꼬리를 만들어주다 재봉틀을 망가뜨리게 한,
이제 공주 시리즈 졸업하나 했더니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흥분한 얼굴로 정말 예쁜 공주를 비디오에서 봤다며 그녀의 이름은 바로 홍탕포카스라고 외치던,
'꿈이 아닌 그 이상'이라는 신데렐라의 노래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따라 부르며 그렇게 그녀가 아름다운 동화 나라에 올인하던 4년이라는 긴 시간.




Sep 2010 | 그렇게 언제까지나 동화의 세계에서 공주로만 살 것 같았던 자두가 벌써 만 7살이 넘었다. 신기하게도 때가 되니 자연스럽게 환상과 현실을 구분할 줄 알게 되고, 지금은 인어공주 원작보다 각색한 바비 인어공주가 더 좋다고 하지만 아직도 산타할아버지와 마법의 존재를 믿는 순진한 우리 딸이다. 자기는 전생에 Rock Dove (비둘기과의 새) 였다면서 소파에서 손을 파닥거리면서 뛰어내리며 자기가 정말 날 수 있다고 믿는 아이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마법을 쓸 수 있다고 믿는 아이다. 겨울에는 매직 파워가 줄어들기 때문에 마법의 힘이 강해지는 봄을 손꼽아 기다리는 요정 같은 아이다.
그런 딸이 여전히 공주에 올인하던 2007년 겨울, 두 번째로 디즈니의 매직킹덤을 찾았다.

2013 Updated |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전사의 후예로 새로 태어난 톰보이가 된 자두. 예전에 자두를 알던 사람들은 도도자두로 불리던 자두 공주와의 괴리감에 멘붕 상태에 빠질 것이다. 엄마인 나 역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으니.




2005년에 처음 매직킹덤에 왔을 때는 놀이기구를 타고 어두운 곳으로만 들어가면 무섭다고 저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두 눈 질끈감고 명상하시던 세 살짜리 아가가,




이젠 저렇게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반짝이며 놀이기구를 제대로 즐길 줄 아는 다섯 살짜리 꼬마 아가씨가 되었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려와서는 "엄마, 나 가슴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 옆에 탔던 내가 비명은 더 많이 질렀지.




퍼레이드를 기다리는 사람들. 일찍부터 자리 잡고 기다리는 건, 잠깐이라도 앉아서 쉬고 싶은 엄마 아빠의 마음.




그러나 결국은 더 잘 보게 해주려고 딸을 목말 태우고 퍼레이드 내내 서 있는 것도 부모의 마음. 근데 아빠의 눈을 보면 누가 더 퍼레이드를 즐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드디어 아기다리고기다리던 공주님과의 접견 시간. 공주님을 직접 만난다고 생각하니 몸과 마음이 모두 떨린다.




현실 세계에 출현한 공주가 낯설기는 모두가 마찬가지. 한 시간을 줄 서서 어렵게 만난 공주님 앞에서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떨구다 나와버린 아이가 귀엽다.




진짜 공주라고 해도 믿을 만큼 예쁜 언니들. 자신을 진짜 공주라고 믿는 아이들 앞에 서는 저 순간만큼은 나 진짜 공주로 살리라.




미국에서 수많은 불꽃놀이를 봤지만 역시 돈 주고 보는 디즈니월드 불꽃놀이가 제일이다. 내가 똑딱이 카메라로 이런 순간을 잡아낼 줄이야. 불꽃놀이를 보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내게는 마법의 성이 진짜로 존재하길 바라는 사람들의 환상으로 보인다. 마법의 성 때문인지 드디어 자두가 불꽃놀이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펑펑 터지는 소리가 무섭다며 눈감고 귀 막고 아빠 품속에 파고들어 꼼짝도 안 하고 엄마 속을 태운지 3년 만이다.




동심을 좌지우지하는 엄청난 파워를 소유한 디즈니. 자두는 졸업했고 이젠 호두가 디즈니세계에 입문할 차례인가. 근데 여보, 뭘 찍는 거야.

2013 Updated | 정말이지 호두는 생의 첫 2년을 티비 안보고 지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티비에 올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뽀로로를 시작으로, 타요버스, 로보카폴리, 치로, 닌자고 등등에서 키마까지. 정말 모르는 만화 캐릭터가 없다. 희한하게 6년 반의 터울 때문인지 자두가 즐겨보던 프로그램과 겹치는 건 없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