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문다. 해가 질 때면 하늘은 온통 가을이 되는 것 같다. 일년 중 세상을 가장 고운 빛으로 물들여놓고 왔는가 싶게 사라져버리는 가을. 하루 중 해질 무렵이 되면 나는 언제나 가을을 느낀다.
저물어가는 태양이 그려내는 마지막 색채의 향연을 즐기기 위해 우리는 늘 열심히 달린다. 그리고 언제나 한가지 딜레마에 빠진다. 일몰은 세상이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뒤덮히는 순간이지만 여행 중에 일몰은 하루의 여정을 마감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의 어둠은 곧 두려움이다. 그래서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마음이 바빠진다. 여운을 간직할 틈도 없이 바삐 떠나야 한다. 태양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서둘러 달려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황혼을 바라보며 조금 더 머물고 싶다는 마음과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딜레마 사이에서 늘 고민한다. 그리고 선택한다. 때때로 우리의 선택은 잊을 수 없는 일몰의 순간들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오늘은 꼭 기억하고 싶은 그 순간들을 기록하려고 한다.
시더키 (Cedar Key, Florida, 2005/12)
여행기 제16편에서 이야기했듯이 2005년 겨울에 플로리다 올랜도로 가는 길에 선배네 집에 들른 적이 있다. 그 때 낚시를 좋아하는 선배가 우리를 데려간 곳이 시더키 (Cedar Key) 라는 플로리다 서해안의 작은 섬이었다. 시더키는 플로리다의 다른 관광지처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는 사람은 최고의 휴양지로 꼽는다는 플로리다의 오래된 항구도시다.
낚시를 허탕치고 시더키의 항구로 발길을 돌린 우리. 온통 분홍빛으로 물든 낮은 하늘과 바다를 보고 숨이 멎을 뻔 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던 하늘은 동쪽 하늘. 해지는 서쪽하늘이 강렬하게 붉은빛으로 타오르는 동안 반대편 역시 수줍은 분홍빛으로 함께 젖어들고 있다는 것을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해지는 동쪽하늘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아무도 모르게 바다까지 물들여 놓은 고요한 동쪽 하늘의 노을을 보는 마음도 어느새 평온과 조용한 감동으로 물들어버렸다.
12월의 인적없는 고요한 항구.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바다에는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펠리칸의 날개짓조차도.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순간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숨이 막힐 듯 아름답고 평온한 바닷가 풍경이었다. 이렇게 평온함을 주는 곳은 또다시 없을 것 같다. 플로리다 반도의 서해인 멕시코만에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동쪽 하늘의 노을을 보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지금까지도 이렇게까지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는 곳은 없었다. 그동안 보아왔던 스펙터클한 대자연의 장관들. 모두 아주 잘 그려진 명화를 보는 듯 했다. 하지만 내 자신이 완전히 동화되어 화폭의 일부로 느껴진 것은 아마도 이날 시더키에서 맞이한 일몰의 순간 뿐일 것이다.
과달루페 마운틴 국립공원 (Guadalupe Mountains National Park, Texas, 2008/11)
플로리다 시더키에서의 일몰이 세상에서 제일 평온하고 고요하게 맞이한 순간이었다면 이곳 과달루페 마운틴에서는 반대로 가장 역동적이고 강렬한 일몰의 순간을 맛볼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두번의 일몰 모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우연히 만났다. 하늘이 준 선물이다.
그러니까 2008년에 조지아에서 아리조나까지 횡단했을 때의 일이다.
과달루페 마운틴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저 멀리 산 위로 둥근 원반모양의 구름이 보였다. 나중에 찾아보니 저렇게 생긴 구름은 렌즈운이라는 높은 고도에서 형성되는 렌즈모양의 구름이라고 한다. 얼핏 보기엔 유에프오 같기도 하고, 더구나 산 위에 저런 구름이 떠있으니 참 신비한 기분이 드는 풍경이었다.
여행 중에 세계에서 볼텍스 (전기파장) 가 가장 세다고 알려진 아리조나 세도나 (Sedona, Arizona) 에 들렀었는데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세도나에서 아무런 기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묘하게 피어오르는 저 구름을 보며 수형이 세도나에서 느끼지 못했던 볼텍스가 저 산에서 나오는게 아니냐고 했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구름 밑의 저 산이 바로 과달루페 마운틴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정면에 보이는 것이 과달루페 마운틴의 엘 캐피탄 (El Capitan) 이다. '대장 (Chief)' 이라는 뜻을 가진 엘 캐피탄은 요세미티의 랜드마크로 세상에 더 잘 알려져있다. 하지만 과달루페의 엘 캐피탄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산맥의 진두에 자리잡고 무리를 이끄는 거대한 바위산의 위용에서 진정한 대장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범상치 않은 기분을 느끼며 도착한 과달루페 마운틴 국립공원은 다른 국립공원들과 달리 자동차로 쉽게 돌아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스톰이 몰아닥칠 것 같아서 일단 그곳을 나와 칼스배드 동굴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동굴 투어를 마치고 뒤늦게 다시 과달루페 마운틴으로 향했지만 시간은 이미 해질 무렵이 되었다.
숙소를 잡아둔 반혼 (Van Horn) 까지가 만만치 않은 거리여서 일단 과달루페 마운틴을 포기하고 서둘러 달리고 있는데 앞쪽의 구름이 영 심상치 않았다. 산을 낮게 뒤덮은 어두운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구름이 뒤덮은 것은 엘 캐피탄 지역 뿐이라 그 너머로는 맑은 날씨였다. 엘 캐피탄에 가까워 올수록 바쁘게 움직이는 구름이 우리까지도 집어 삼킬듯한 모습이라 겁이 났다. 사막 한복판이라 스톰이 몰아닥쳐도 피할데도 없었다. 우둑우둑 비를 내리던 구름을 벗어나 한숨 돌리는데 저 멀리 엘 캐피탄을 둘러싼 구름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보는 앨 캐피탄의 바위 뒤편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은 불지 않는 것 같은데 구름은 무척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크고 작은 구름들에 반사되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붉은 빛의 하늘이라니, 우리가 지금까지 본 가장 역동적인 일몰의 순간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구름이 시작되는 곳이 엘 캐피탄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엘 캐피탄 정상에서 피어오르는 구름은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빠르게 움직이며 마치 봉화를 피우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벅찬 순간을 한장이라도 더 담아보려고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지만 제대로 찍히지 않았다. 이 신성한 순간을 감히 사진에 담으려는 것이 불경한 행동이었을까.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석양이 아름답다는 곳을 지나며 노을을 보려고 여러날 애를 썼는데 다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이곳에서 내 인생 최고로 멋진 노을을 보게 될 줄이야. 이곳에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이와 같은 멋진 일몰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이 날의 추억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하트웰 댐 (Hartwell Dam, 2004/09)
2004년 가을, 자두를 한국에 보내고 적적하던 우리는 주말이면 무작정 밖으로 나가 정처없이 달리기만 하던 묻지마 한시간 드라이브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지나친 하트웰 댐. 댐이 가둔 물이 만들어낸 수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던 태양과 노을을 한없이 바라보다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해가 지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클리어워터 비치 (Clearwater Beach, 2006/12)
2006년 겨울, 플로리다 일주를 할 때의 일이다.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인 플로리다 서부의 탐파 베이. 7박8일의 여행을 마무리 지으며 멕시코만에서의 일몰을 보기 위해 클리어워터 비치를 찾아가고 있었다. 국도 699 번을 타고 세인트 피터스버그에서부터 올라가는데 차가 너무 많이 막혔다. 지도에서 보니 국도 699번이 해변을 끼고 달리는 도로라 차를 타고 가면서 해변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는데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시야를 가로막는 호텔들 때문에 바다를 보기는 커녕 해변으로 들어가는 길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699번 도로를 타기 시작한지 두시간이 넘었는데도 클리어워터 비치에 도착하지 못했다. 해는 점점 낮아지고 마음은 바빠지고. 해가 넘어가기 직전 겨우 클리어워터 비치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넜지만 이번엔 해변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다시 다리를 건너 근처에 있던 샌드키 주립공원 (Sand Key State Park) 에 들어갔다. 일몰에 문을 닫는다는 표지판을 보고도 일단 들어가고 보자는 마음으로 들어가 급하게 차를 주차하고 해변으로 갔다. 이미 해는 막 수평선 아래로 사라져버린 뒤였다. 백사장이 너무 넓어서 마치 해가 지평선 아래로 지고 있는 것 같았다. 사라져버린 태양의 끝자락만을 안타깝게 바라보다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일몰을 바라보는 제일 아쉬운 순간이었다.
해이스택 락 (Haystack Rock, Oregon, 2010/06)
2010년 수형의 학회 참석차 오레건 포틀랜드에 갔다가 오레건의 상징인 해이스택 락을 보러 갔다. 캐논 비치에서 시간을 보내다 저녁을 먹고 나니 해가 질 시간이 되었다. 주택가 좁은 담장 사이를 통과하니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해변가에 우뚝솟은 커다란 바위 덩어리. 캐논 비치에서 바라볼 때는 이렇게 큰 줄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작은 섬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큰 바위였다. 마침 썰물 때라 해이스택 락이 완전히 물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갯벌을 걸어 가까이 가보니 해이스택 락에 서식하는 수많은 퍼핀 (Puffins) 들이 바위 꼭대기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쌀쌀한 오레건 코스트의 바람을 맞으며 바라본 해지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해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가 되서야 해변을 떠날 수 있었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는 법. 포틀랜드로 돌아오는 길. 고된 일정으로 피로가 절정에 달한 수형에게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밤길 운전이 서툴러서 어쩔 수 없이 수형이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높이가 몇십미터에 달하는 도로변의 침엽수들 때문에 길은 완전히 깜깜했다. 구불구불 어두운 숲길을 달리는 내내 난 수형의 몫까지 긴장해야 했다.
옐로스톤의 일몰 (Yellowstone National Park, 2010/07)
옐로스톤에서 일몰은 곧 동물들의 출근시간을 의미한다. 사실 예전에는 몰랐다. 그땐 해지기 전에 숙소에 들어가기가 바빴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옐로스톤을 하루일정으로 잡았기 때문에 아침부터 해질때까지 아주 열심히 알차게 돌아다녔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점심 먹고 오후에 옐로스톤을 빠져나와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는 베어투스 하이웨이 (Beartooth Highway) 를 타고 몬나타로 넘어가 빌링스까지 가야만 했다. 그런데 사람 일이 어디 그렇게 되나. 조금만 더, 이것까지만 보고, 하다보니 벌써 해질 무렵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우리의 발목을 잡은 것은 출근시간 되어 슬슬 나타나기 시작한 야생동물들이었다. 특히 가는 곳마다 어찌나 곰들이 출현해주시는지 우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특히 사진 속의 저 대담한 어린 곰은 차가 다니는 도로 한복판을 사람들의 시선 아랑곳하지 않고 어슬렁 어슬렁 걸어다니다 결국 파크레인저에게 쫓겨났는데, 곰의 뒤를 쫓아가는 것이 어찌나 즐겁고 재밌던지 산넘어 가야할 길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즐거웠던 일몰의 시간에 대한 댓가로 우리가 한밤중에 베어투스 하이웨이 (위험천만한 산악도로) 를 넘어가며 겪어야 했던 고통과 시련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겠다. 지금 여기에서는 일몰의 시간, 야생동물들을 보면서 내질렀던 즐거운 비명만 기억하고 싶다.
'별책부록 > 시공초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79편. 해마다 꽃피는 봄이 오면 (Spring Picture Day, 2002-2010) (0) | 2014.06.01 |
---|---|
제78편. 지금까지 다녀온 미국의 국립공원 (National Park Entrance Pictures, 2006-2011) (0) | 2014.06.01 |
제77편. 뒷모습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여행 (Daddy and me, 2006-2011) (1) | 2014.06.01 |
제75편. 미국 주별 웰컴 표지판 모음 40/50 (Welcome Centers, 2002-2011) (0) | 2014.06.01 |
제74편. 해마다 찍는 특별한 가족사진 (Family Shadow 2006-2012) (1) | 2014.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