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7 |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2006년 7월 14일 Bakersfiled, CA - Grand Canyon NP - Flagstaff, AZ 600 mile / 960 km |
전날 신나게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 (Pacific Coast Highway)를 타고 내려와 46번 도로를 만나 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식 명칭이 캘리포니아 스테이트 루트 1 (California State Route 1)인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는 바다를 옆에 끼고 달리는 미국에서도 몇 안 되는 도로 중에 하나로 대륙과 대양의 경계를 달리는 미국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였다. 절벽과 낭떠러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달리다 보면 잠시도 눈을 돌릴 수가 없는 긴장이 계속되지만, 유혹을 이기지 못해 자꾸만 흘끗흘끗 옆을 훔쳐보게 되는 스릴 넘치는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몬터레이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100마일 구간은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는 대신 엄청난 통행료를 지불해야 되니, 그건 일단 이 도로를 타면 끝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산타 루시아 산맥 (Santa Lucia Range)과 평행하게 달리는 이 구간에서는 일단 몬터레이를 벗어나게 되면 산맥을 가로질러 넘어가는 도로가 없어서 캠브리아 (Cambria)까지 100마일을 달린 뒤에야 동쪽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일방도로나 다름없다.
처음엔 태평양의 넓고 깊은 바다를 보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언제까지나 이 길을 달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속도를 내서 달릴 수 없는 위험천만한 절벽 코스를 달리는 것이 점점 부담되기 시작했다. 결국 세 시간이 걸려 마침내 만나게 된 46번 도로가 어찌나 반갑던지.
이젠 집으로 가는 길이다. 베이커스필드 (Bakersfield)에서 캘리포니아 58번 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바스토우 (Barstow)에서 I-40 을 만났다. 이곳은 바로 I-40 East가 시작하는 지점이다. I-40 도로는 캘리포니아 바스토우에서 노스캐롤라이나의 윌밍턴 (Wilmington)까지 이어지는 2,555마일의 도로인데 미국에서 세 번째로 긴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다. 이제부터 테네시 멤피스 (Memphis)까지 I-40 도로 위를 달리는 1,700마일의 길고 긴 동진이 시작된다.
베이커스필드에서 그랜드캐년이 있는 플래그스탭 (Flagstaff)까지는 지형적으로 베이슨앤레인지프러빈스 (Basin and Range Province) 지역이라 불리는데 사진에서와 같은 크고 작은 산맥들이 꾸준히 나타났다 사라졌다.
참 길고도 지루한 길이었다. I-40 이 우리에게 던지는 유혹을 무시하고 앞으로 전진만 하려니까 길고 지루한 게 당연하지.
바스토우에서 처음 I-40이 시작하는 지점은 I-15 도로와 교차하는 곳이기도 한데 이 I-15 North를 타면 두 시간 반 만에 라스베가스를 갈 수 있다. 하지만 라스베가스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주문을 외우고 통과.
생각해보니 이 I-40 도로는 엄청난 유혹들이 도사리는 길이다. 라스베가스를 필두로 그랜드캐년, 세도나, 페트리파이드 포레스트 국립공원, 앨버커키, 산타페, 멤피스 같은 곳들이 I-40 을 타고 가면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여행지들이다. 굳은 심지의 소유자 수형이 단호하게 이 유혹들을 물리치지 않았다면 아마 집으로 가는 길이 엄청 오래 걸렸을 (하지만 재미는 있었을) 거다.
생각해보니 이 I-40 도로는 엄청난 유혹들이 도사리는 길이다. 라스베가스를 필두로 그랜드캐년, 세도나, 페트리파이드 포레스트 국립공원, 앨버커키, 산타페, 멤피스 같은 곳들이 I-40 을 타고 가면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여행지들이다. 굳은 심지의 소유자 수형이 단호하게 이 유혹들을 물리치지 않았다면 아마 집으로 가는 길이 엄청 오래 걸렸을 (하지만 재미는 있었을) 거다.
하지만 강철 심장 수형도 결국 그랜드캐년 앞에서는 무너지고 만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실 캘리포니아까지 갔다 오면서 바로 옆을 지나치는 그랜드캐년을 들르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처음부터 여행 계획에 넣지 않았다는 거 자체가 이해 불가지만 여튼 그때는 그랬다.
I-40을 달리다 맨 처음 그랜드캐년으로 나가는 출구가 나왔을 때는 그냥 지나쳤다. 우리 둘 다 속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쨌든 마음을 접고 달리는데, 조금 있다가 그랜드캐년으로 나가는 출구가 또 나온다. 어라, 아직 기회가 있다니. 수형을 슬쩍 떠봤는데 약간 흔들리는 거 같지만 잘 넘어오지 않는다. 또 지나친다. 다음에 시간 내서 또 오면 되지 뭐. 아쉬운 마음 달래는데 이런이런 또 그랜드캐년 출구다. 이거 뭐야, 그랜드캐년을 가야 하는 운명인 거야? 왠지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은 느낌. 둘 다 마음이 바쁘다.
갈까? 가고 싶어? 가도 좋고 뭐 안가도 그닥. 어쩔거야? 가 말어? 빨리 결정해. 글쎄. 가고 싶어? 후회하지 않을까? 그럴 거 같기도 하고.
에라이.
출구를 지나치기 직전에 운전대를 홱 틀어 빠져나간다. 잘~했어 짝짝짝.
우리가 탄 길은 그랜드캐년 빌리지로 가는 64번 도로. 나중에 지도를 보니 처음에 나왔던 출구에서 빠져나갔으면 되려 고생만 할 뻔했다. 이럴 때 우리는 럭키하다고 하지.
정말 보는 순간 허허헉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났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실제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촬영할 때 쓰는 배경사진 같아서 손으로 툭 밀면 그림판이 뒤로 넘어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평생 이런 기분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 지도 | Grand Canyon National Park Map
아까 하이웨이에서 나와 공원까지 가는 한 시간 동안에는 우리가 제대로 가는 건가 싶을 정도로 주위 경관이 평범했다. 그랜드캐년은 한국 사람들이 나이아가라 폭포와 함께 일 순위로 뽑는 미국 여행지라는데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닌가 보군 하는 마음으로 공원에 들어섰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캐년 가까이에 다가가면서 저 멀리 캐년의 끝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시야를 가득 메운 캐년의 장관.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곳 바로 앞의 땅이 쑤욱 꺼지면서 아름다운 조각산을 만든 것 같은 풍경이었다.
갑자기 진시황제의 병마용갱이 생각난다. 흙 속에 묻혀있던 만 명에 가까운 토병과 말, 전차들. 흙을 걷어내고 먼지를 털었을 때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처럼, 소인국의 걸리버만큼이나 큰 어느 거인이 입으로 흙을 불어내고 붓으로 조심스럽게 먼지를 쓸어냈을 때 캐년이 그 섬세한 자연의 조각작품을 드러내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기대나 마음의 준비 없이 봐서 더 그랬는지, 특별할 것 전혀 없는 평범한 길 끝에 나타난 장관 앞에서 탄성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땅속 깊이 침식이 되었을까 싶었는데 사실은 우리가 서 있는 그 지역이 이미 고도 2,000미터가 넘는 콜로라도 고원 지역이고 캐년의 맨 아래도 해발고도 700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받아 캐년의 색이 선명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그림처럼 보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랜드 캐년에서의 30분. 하지만 그때 받은 충격과 자극은 일회성으로 끝나버렸을 우리의 자동차 여행에 완벽한 모티브를 제공하였다. 상상이 허용하는 그 이상의 거대한 스케일에 완전히 사로잡혀 그제야 눈을 뜬 소심부부.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야 말았다.
2008 제2차 자동차 미대륙일주 | 2008 Cross Country Road Trip II
2010 제3차 자동차 미대륙일주 | 2010 Cross Country Road Trip III
Day 8 | 콜로라도 고원에서 대평원까지
Flagstaff, AZ - Amarillo, TX 600 mile / 960 km |
플래그스탭 (Flagstaff)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집을 향해 출발했다. 오늘 우리는 콜로라도 고원 (Colorado Plateau)과 베이슨앤레인지프러빈스 (Basin and Range Province) 를 거쳐 대평원 (Great Plains) 을 달리게 된다.
이 지도는 내가 여행기를 쓰느라 미국의 지형에 대해 공부하면서 몇 개의 지도를 겹치고 수정해서 만든 지도다. 이렇게 지도를 만들고 나니 앞으로 미국 서부지역에 대한 여행기를 쓸 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이번 여행 때문에 자두 데이케어센터 비용 일주일치가 굳었다. 그걸로 모조리 자두 장난감을 사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트렁크에 잘 쟁여두었다. 자두가 여행 중에 지루해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주려고 말이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밑천이 바닥나버렸다. 생각보다 길이 너무 멀고 지루했다. 중간에 달러샵에 들러 몇 가지 장난감을 더 사서 주긴 했지만 차를 싸구려 장난감으로 채우는 데도 한계가 있더라는.
그래도 이 어린 것이 어떻게 이 먼 길을 버텨주었는지 참 기특하고 고맙기만 하다. 우리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모든 사람이 자두에게 일등 공로상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정말이지 자두가 아니었으면 제대로 끝마칠 수 없는 여행이었다.
별다른 기억이 남아있지 않은 날이다. 아이에게는 달리 기분 좋게 눈 둘 곳도 없는 풍경을 보며 달리기만 했으니까. 그래서 오늘은 조금 일찍 숙소를 찾아 들어가 호텔 수영장에서 놀고 또 텍사스 스테이크도 먹으면서 여유 있는 저녁을 보내며 자두를 달래주었다. 내일은 정말 긴 하루가 될 테니까.
Day 9 | 집으로 가는 스무 시간의 대장정 2006년 7월 16일 Amarillo, TX - Athens, GA 1,200 mile / 1930 km |
견적도 안 나오는 엄청난 거리를 달렸다. '당신들 정말 미친 거아냐' 소리가 절로 나온다. 수형과 내가 번갈아가면서 운전을 했다. 나도 이젠 제법 운전에 탄력을 받아 트럭이 앞에 있으면 수형의 도움 없이도 머뭇거리지 않고 추월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대도시는 여전히 수형의 몫이지만.
오클라호마를 달리던 중이었다. 점심을 먹을 때가 됐는데 싸 가지고 간 반찬이며 먹거리가 거의 바닥이 나서 간단히 외식하기로 하고 적당한 곳을 찾는데 오클라호마도 꽤나 시골 동네라 아무리 달려도 휴게소는 커녕 출구 (Exit)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작은 마을을 하나 찾아 피자집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우리 가족이 들어가는 순간 주위에 흐르는 정적, 그리고 일제히 우리를 향한 사람들의 눈초리라니.
와, 견디기 어려웠다. 보아하니 피자집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서로 알고 지내는 분위기. 우리 같은 황인종을 처음 보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결국 배도 다 채우지 못하고 나오는데 피자 뷔페라 먹던 걸 들고 나올 수도 없고 참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거기가 어디였나 하도 궁금해서 찾아보다 결국은 5년 전 신용카드 명세서까지 뒤졌군.
찾았다, Simple Simon's Pizza. 내 집요한 근성이란.
테네시 멤피스에 도착하면서 마침내 I-40와 헤어졌다. 멤피스에서 앨라배마의 버밍햄 (Birmingham)까지의 250 마일 거리는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가 없어서 US78을 타고 가야했다 (현재는 I-22 가 개통했음).
미시시피를 지날 무렵 해가 졌는데 내가 밤 운전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날이 조금이라도 밝을 때 달려보자 해서 열심히 액셀을 밟고 있었다. 해 질 무렵이라도 한여름철이라 아마 9시는 넘은 시간이었을 거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몸도 너무 피곤해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게 무척 힘들었다. 스스로도 내가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수형을 생각해서 내가 조금이라도 더 달리고 싶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길래 운전대를 넘기기로 하고 적당한 곳을 찾는데 이 지역도 아주 한참 시골이라 아무리 달려도 출구가 나오질 않는거다. 수형한테 얘기는 안했지만 나에게는 이번 여행 중 제일 힘든 시간이었다.
2005 Photo | 버밍햄에 도착하니 자정이 훨씬 넘었다. 문을 연 맥도날드를 겨우 찾아 1불짜리 버거를 사서 먹고는 아무래도 하룻밤 자고 가는 게 나을 거 같아 적당히 수형의 눈치를 보며 운을 띄웠는데 이게 웬걸, 다섯 시간 밖에 안 남았으니 잠은 집에 가서 자잔다.
다섯 시간 밖에? 어디 동네 마실 나왔수?
사람이 아무리 적응의 동물이지만 8박 9일 만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 걸까. 하긴, 멤피스에서 I-40 를 빠져 나오면서 우리가 그랬다.
"탄력받은 김에 그냥 이대로 쭈욱 달려서 뉴욕까지 갈까?"라고.
2007 Photo | 추적추적 비는 내리고, 'Georgia on my mind'라는 조지아 웰컴 표지판을 통과하는데, '해냈구나' 하고 드는 마음. 익숙한 I-85 선상의 애틀랜타 다운타운, 그 텅 빈 도로를 달리는데 집에 도착한 것보다 더 반가웠다. 혹시나 집에 가까워졌다고 수형이 운전하면서 방심할까 봐 나는 더 바짝 긴장했다. 웬일인지 애틀랜타에서부터 집까지 가는 익숙한 길이 되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마침내 집에 도착하니 새벽 4시가 넘었다. 스무 시간의 대장정. 절대로 깨지 않을 평생에 한 번 세운 기록이다.
집에 들어왔을 때 집에서는 낯선 냄새가 났다. 집 안 구석구석 살피고 나니 그제야 정말 집에 온 것 같았다. 너무 피곤해서 잠도 오질 않는다. 하루종일 피자, 햄버거만 먹었더니 라면이 땅긴다며 그 시간에 수형이 냄비에 물을 올린다. 그럼 나도 한 젓가락만.
8박 9일, 아니 8박 10일의 숨 가빴던 달리기를 매콤한 라면 국물을 마시며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