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 2011 | 대도시에 난데없이 나타난 회색빛 고래. 멀리 도시의 건물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돌산을 보면서 고래가 생각났다. 아님, 거인이 강가에서 주워다 던져놓은 매끈한 조약돌 같기도 하다. 여튼 굉장히 독특한 풍경임은 틀림없다.
영락없이 고래 몸통 같은 이 돌산이 조지아 애틀랜타의 유명한 랜드마크인 스톤 마운틴 (Stone Mountain)이다. 높이 250 미터, 너비 14 킬로미터의 거대한 화강암 돌덩이는 그 자체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하지만, 그 벽면에 새겨진 조각 (Bas-relief: 얕게 판 부조) 때문에 더 유명하다. 세계에서 제일 큰 바스릴리프라는 이 부조의 주인공은 바로 남북전쟁 중 남군을 이끌었던 세 명의 지도자들, 제퍼슨 데이비스 (Jefferson Davis) 남부연합 대통령, 스톤월 잭슨 (Stonewall Jackson)과 로버트 리 (Robert E. Lee) 장군이다.
처음엔 돌산의 규모와 그 벽면에 새겨진 거대한 조각을 보고 놀라지만 그 주인공이 누군지 알게 되고선 더 놀라게 된다. 한국에 있을 땐 알지도 못했던 이 조지아라는 남부 시골이 딥사우스 (Deep South: 미국 남부지방)의 중심지며, 그중에서도 이 스톤 마운틴은 남부인들의 성향을 보여주는 가장 정치적 상징이라는 걸 깨닫는다. 실제로 이 스톤 마운틴은 반흑인 극우비밀조직인 KKK (Ku Klux Klan)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1915년 이후 KKK의 부활이 이곳에서 논의, 진행됐으며 1931년에서 1981년까지 스톤 마운틴은 KKK 단체의 연례집회 장소였다고 한다.
봄부터 가을까지 스톤 마운틴에서는 주말 밤이면 거대한 돌산의 벽면을 스크린 삼아 레이져쇼를 보여주는데 놀랍게도 그 내용이 대부분 남부예찬이다. 화려한 레이져빔과 밝고 쾌활한 음악 뒤에 숨겨진 이 남부 공익광고의 절정은 돌산에 새겨진 남군 세 지도자의 부활이다. 레이져빔으로 벽면의 조각을 따라 그대로 세 명의 지도자가 그려지고 이들이 앞으로 달려 진군하는 모습이 비칠 때 분위기는 절정에 다다른다. 넓은 잔디밭에 앉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이 (기술적으로) 멋진 쇼에 매번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정작 흑인들을 본 적이 별로 없다. 당연하다.
이미 150년 전에 끝나버린 남북전쟁. 하지만 아직도 남부인들의 가슴에 남북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미 150년 전에 끝나버린 남북전쟁. 하지만 아직도 남부인들의 가슴에 남북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2003 Photo | 자, 그럼 이제 정치적인 이야기를 뺀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해볼까. 스톤 마운틴은 자두가 태어나고서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나들이를 한 곳이다. 5개월 된 자두를 데리고 7월의 어느 날 처음으로 스톤 마운틴에 왔다. 주변 대충 돌아보고 점심도 먹었는데 밤 9시에나 시작하는 레이져쇼를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애틀랜타에 온 김에 장이나 보자고 해서 장을 보고 왔다.
장에 가기 전에 찍은 사진. 사진 배경의 한산하던 잔디밭이,
2003 Photo | 장에 다녀오자 이렇게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미국에 와서 이렇게 많은 사람은 처음 봤다. 주말에 가족끼리 피크닉 왔다가 다들 우리처럼 레이져쇼로 하루를 마감하려고 모여들었나 보다. 사람이 이렇게 많으면 힘들고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사람 많은 게 하나도 싫지 않았다.
피크닉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본 사람들 대부분이 거창한 식사 대신 간단하게 떼울 수 있는 음식들로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원래 소풍가면 이거저거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게 우리나라 사람들인데 여기선 참 대충 먹고 사는구나, 첨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차차 일어나는 생각의 전환. 가벼운 마음으로 휴식을 즐기다 가는 모습이 좋아 보이기 시작했다.
또 한가지 놀랐던 점, 집에서 덮던 것 같은 이불들을 들고 와서 축축한 잔디밭에 척척 깔고 앉거나 누워있는 모습들. 아, 과연 저 이불을 집에 가서 덮고 잘 건지.
2003 Photo | 조심스러웠던 우리의 첫 나들이. 생각보다 즐거운 하루였다.
물론 불꽃놀이 할 때는 자두 귀를 막아줘야 했지만.
2003 Photo | 한국에서 자두를 보러 오신 어머니를 모시고 스톤 마운틴에 갔다.
어머니 머리 색과 호숫가 단풍의 색이 잘 어울린다.
2004 Photo | 자두를 데리러 오신 우리 엄마. 자두 표현을 빌리자면 내 엄마.
2004 Photo | 돌이 갓 지난 자두.
2007 Photo | 2006년에도 한 번 온 적이 있지만 사진이 없어서 패스.
2007년 7월 4일 아파트 이웃들과 불꽃놀이를 보러 스톤 마운틴에 왔다. 미국의 광복절인 독립기념일은 전역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 (Firework)로 온 나라가 축제에 빠지는 날이다. 우리 같은 외국인들은 축제의 의미와 상관없이 화려한 불꽃놀이를 즐기면 그만이다. 스톤 마운틴은 조지아에서도 제일 규모가 큰 불꽃놀이가 열리는 곳이라 사람에 치일 줄 알면서도 몇 년 만에 큰 맘 먹고 북새통 속으로 뛰어들었다.
2007 Photo | 스톤 마운틴에 이렇게 여러 번 왔으면서 한 번도 정상에 올라가 본 적이 없었다. 정상은 등산해서 갈 수도 있고 케이블카를 타고도 갈 수 있다. 자두를 데리고 처음으로 올라온 스톤 마운틴의 정상. 보시다시피 넓고 평평한 화강암 운동장이다.
2007 Photo | 처음으로 케이블카를 타고는 잔뜩 들뜬 자두. 넓은 운동장을 보니 마구 뛰어다니고 싶은가보다. 단단한 바위에 넘어져 깨질까 나는 옆에서 전전긍긍.
2007 Photo | 정상에서의 전망. 이렇게 넓은 숲 한가운데 어떻게 이런 큰 돌덩이가 자리를 잡게 되었을까. 누군가 놀다가 던져놓고 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보시다시피 조지아는 숲이 많은 지역이라 꽃가루 알러지가 심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름이면 숲이 뿜어낸 축축한 공기들이 하늘로 올라가 소나기를 뿌리는데, 오후마다 천둥 번개 치는 소나기가 내려도 뜨거운 햇볕 때문에 금세 빗물이 다 말라버린다. 어떨 땐 하루종일 실험실에서 일하다가 퇴근하려고 나오면 소나기가 왔었는지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다.
2007 Photo | 스톤 마운틴 앞쪽의 잔디밭이 불꽃놀이를 보러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다. 아주 일찌감치부터 자리를 맡아놓기 때문에 우리 같은 지각생들은 발 디딜 틈도 없다.
2007 Photo | 모두가 함께하는 즐거운 저녁 시간. 나와 수형이 번갈아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모두가 함께 나온 사진이 없다. 어쩔 수 없이 포토샵으로 수형을 내 옆에 살포시 앉혀드렸다.
2007 Photo | 마침내 시작된 불꽃놀이.
본격적으로 자동차 여행을 시작할 때까지 우리의 유일한 나들이 장소였던 애틀랜타 스톤 마운틴. 우리 가족에겐 미국인들의 여가생활과 레저문화를 알려준 배움터이기도 하다. 거대한 돌산을 스크린으로 삼아 레이져쇼를 한다는 놀라운 발상은 지금까지도 인상 깊게 남는다. 다만 백인 일색의 잔디밭에서 레이져쇼와 불꽃놀이가 한창일 때 그 쇼가 전하는 메시지를 읽지 못한 채 화려한 쇼에 매료되어 박수 치고 즐기던 몇 안 되는 아시아인이었다는 생각을 하면 살짝 부끄러워질 뿐.